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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4. 2024

이규리《시의 인기척》

잠들지 않고 밤새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그만 이렇게...

  “이른 새벽 산책길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의 전깃불이 팟! 하고 일제히 꺼지는 순간, 불 꺼진 자리에 잠시 고이는 어둠을 지우자 한 사람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저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이곳에 형광빛이 도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 정장바지를 입은 남자가 벤치에 있었다. 정물처럼 고정된 뒷모습이 카메라의 줌처럼 확 당겨왔다. 젖은 물소리가 들렸다. 어떤 절망이 저토록 아름답다면 우리가 절망을 피할 필요가 있을까. 비참이 매혹이 될 때까지 숨어서 보았다. 서늘하고 길었다. 아름다움이 추위처럼 파고든다.” (p.17)


  과거로부터 호출된 어떤 광경은 느닷없어서 뻘쭘하다. 그해 겨울 양생養生을 포기한 것인지 바닥이 울뚝불뚝하고 철근이 꽃처럼 솟아 있는 공사판에 나와 후배가 있다. 설움에 겨워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고 나를 잡아 끈 민소매 차림의 후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충혈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내 뒤편의 어둠을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싸락눈이 내렸던가.


  “정도란 걸 벗어나면 어떻게든 그 여파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정신적인 면만 그런 게 아니다. 마스카라가 너무 짙어 눈가에 먹물이 번진 건 적당하지 않아서다. 또한 귀에 뚫은 구멍이 늘어나 늘어난 구멍에 맞추기 위해 귀걸이는 점점 커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늘어난 구멍이 측은하다. 대가는 유형만이 아니다. 몸은 기억이 명확하고 습관은 기억이 실행된 흔적이다.” (p.21)


  그해 겨울 구불구불한 벽돌담은 미로처럼 좁았다. 후배와 내가 서성였던 근처에 미로 같은 골목이 있었다. 그때의 어떤 선배와 그 벽돌담 골목을 몇 번이고 방문했다. 선배는 그 골목에서 넘어져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벽돌담이야말로 범인이라고 우겼다. 벽돌담이 자신을 공격했다며 나에게 그 장면의 목격자 되기를 강권했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고 함께 그 골목을 걸었다. 다음날 선배의 얼굴 상처는 더욱 커졌고, 나는 목격자가 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도 불완전한 자의 위치를 벗어날 순 없지만 해답을 구해야 하는 일에 직면할 때면 더 아름다운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제는 덜 부끄러운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입을 닫는다.” (p.46)


  나는 어느 밤 술자리, 헤어진 연인의 눈에서 오래전 나를 향하던 그 달콤하면서도 애처로운 빛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 눈빛은 오래전 내가 가슴 뿌듯하게 받아 안았던 것과 궤를 같이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종착점의 위치만 달라졌다. 나는 폐허가 된 간이역의 역장처럼 순식간에 낡아졌다. 내가 낡아진 것인지 간이역이 낡아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는데, 그래도 기차는 지나가는 것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죽을 때의 자세는 죽기 전의 태도가 규정한다. “인간의 입술은 그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는 만델스탐의 말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 같다. 나의 마지막 발음은 부디 나를 떠난 것, 내가 아닌 것, 내가 모르는 무엇이기를 바란다.』 (p.91)


  오래전 어떤 시절,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려지는 하나의 가닥이 있다면 그것만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되도록 많은 사랑을 조롱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만델스탐의 말대로라면 사랑은 내가 마지막으로 발음한 이름에만 깃들어 보존되는 무엇이라고 우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제 작가의 바람대로 그 어느 누구도 발음하지 않아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은 채로 떠나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랑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가족은 벌레 먹은 사과와 같아요. 누군가는 벌레이고 누군가는 과육이지요. 상한 부분은 다 같이 엎디어 울었던 그 겨울밤의 눈물자국.” (p.125)


  ‘이규리 아포리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인데, 몇몇 문장은 그냥 시이다. 책의 제목은 《시의 인기척》인데, 인기척만으로도 시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호출된 그해 겨울 혹은 오래전 어떤 시절 나는, 그 인기척을 기대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근거리곤 하였던 것 같다. 어쩌면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짓 인기척에 속아 눈물 흘린 적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잠들지 않고 밤새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그만 이렇게 잠에서 깨어났더니...



이규리 / 시의 인기척: 이규리 아포리즘1 / 난다 / 228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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