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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4. 2024

김현 외《첫사랑과 O》

어느 순간 오래 전 O와의 약속이 불쑥 떠오르고...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을 읽다가 문득 O를 떠올렸다. 작중 인물인 사마드가 아치에게 ‘누군가 동양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너의 판단을 유보해 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였다. 인도인인(실은 방글라데시인) 사마드가 영국인인(그러니까 백인) 아치에게 동양에 관해 뭔가를 알아야 할 때 자신을 하나의 필터로 삼아주면 좋겠다고 넌지시 어필을 하는 부분이었다.


  “... 그 당시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19금 영화 같은 걸 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의 내게 사랑이라는 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아무런 장애도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 거기에는 성적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p.24, 손보미 <첫사랑> 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설 속의 저 장면을 읽는 순간, 오래 전 O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조약을 맺었다. 내용인즉슨 나 혹은 O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순간이 왔을 때, 딱 한 번은 상대방의 편에 서겠다는 약조였다. 그렇게 같은 편에서 손가락질을 감내하겠다는 약속이었다. O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 약속은 나를 굉장히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가 그리 갈게요 / 당신이 이리 와요 / 흔들리지 않아요 / 오, 흔들어 주세요 //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모른 척했다 // 사랑의 시절이 / 생생하게 변질되어 갔다” (p.41, 김현 <이별의 스노우볼> 중)


  그 약속을 한 것이 영화 <접속>의 개봉 언저리였으니 1997년 말이나 1998년 초였을 것이다. 사실 O와 저런 약속을 하게 된 배경에는 영화 <접속>도 자리한다. 당시 O는 롯데월드 지하 한 켠에 위치한 작은 극장에서 근무하였고, 극장에서는 영화 <접속>이 연일 매진 행렬 중이었다. 어느 날 O는 나에게 두 장의 표를 준비해 놓았다고 알려왔다. 세상 사람이 모두 보는 영화이니 그 행렬에 동참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 부른다 / 깨지면서 태어나 휘발되는 것 / 부화를 증오하는 것 / 날아가는 속도로 죽는 것” (p.45, 박연준 <불사조> 중)


  나와 나의 연인은 O가 마련해준 초대권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섰다. 작은 극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고, 작은 극장답게 스크린을 향한 객석의 각도는 관객 모두에게 골고루 조금씩 스크린을 앞사람의 뒷통수에게 양보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연인만큼은 양보를 하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O가 우리의 바로 앞 두 자리까지를 비워 놓는 허세를 부려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파종이라면 / 당신은 내 위에 무엇을 심으시겠어요?” (p.68, 박연준 <상처 입은 사슴―좇는 자와 도망가지 않는 자> 중)


  그렇게 나는 O에게 크게 감동하였고 우리는 약조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감동도 받고 왠지 나에게 유리한 약조도 맺었다. 그때의 나는 그러고 살았다.) 이십 오년 정도가 흘렀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그때의 약조를 지켜야 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그때의 연인은 지금의 아내이고, 현재 O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차로 십오 분이면 닿을 거리에서 일하며, 이제 막 읽은 책의 제목은 《첫사랑과 O》이다. 



첫사랑과 O / 김현, 문보영, 박연준, 배수연, 서윤후, 손보미, 안희연, 오은, 유진목, 정지돈, 최지은, 황인찬 / 알마 / 105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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