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되어야 유의미한 세계를 위하여...
*2011년 1월 1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전 세계, 즉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를 자초한 그 세계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를 느낀다.” (pp.15~16)
어느 곳에선가 위의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이전 세계란 바로 코로나 이전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어둠에 잠긴 현재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으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 어둠을 걷히는 순간 다시 한 번 현재의 어둠의 세계를 만든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크 아탈리는 지적하고 있었다. 자크 아탈리의 《생명경제로의 전환》을 읽기로 작정했다.
“우선, 건강 관련 체계만 보더라도, 공중보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자산이 아니라 부담으로 생각하는 이념 탓에 도처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다음으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상호의존적으로 변했다. 예전엔 요즘처럼 여행이며 각종 회합, 관광 횟수가 잦지 않았다. 금융의 세계화 또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인류가 지나치게 자기만족적이 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인류는 비극적인 것의 의미를 상실했다. 아무도, 거의 아무도, 제일 힘이 세다고 여겨지는 나라에서일수록 불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다른 행태로는 지난 20년 동안 줄곧 이기주의와 단기적 관점, 타인에게 폐쇄적인 성향 등이 이타주의와 장기적 관점, 타인에게 열린 마음보다 많은 지지를 받아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모든 점에서 과도했다. 지나친 경박함, 지나친 이기주의, 지나친 불성실, 지나친 불확실성. 지나친 부와 지나친 가난. 참을 수 없는 거품. 점점 더 재앙으로 변해가는 기후 상황. 끝없이 이어지는 낭비... 마지막으로, 그렇지만 아마도 나머지 것들을 두루 설명할 수 있을 가장 핵심적인 행태로는 기초적인 위생 서비스로의 접근마저 허용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상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세계 인구의 45퍼센트 이상이 효율적인 위생 서비스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40퍼센트 넘는 인구가 집에서 깨끗하게 손을 씻을 수 없는 형편이고, 20억이 넘는 사람들이 위생적인 화장실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모두 고려해보건대,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어떤 방식으로건 이 모든 것이 더는 지속될 수 없음을, 이 모든 것을 더는 묵과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짐작하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므로 모든 건 변해야 한다.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pp.81~83)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제 겨우 일 년이 되었다. 이 책이 번역 출간된 것이 작년 11월이니까, 저자는 코로나 19가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책을 썼으리라 여겨진다. 책의 뒤에 실린 통계 자료가 5월에서 멈춰져 있는 것을 보면 코로나가 2차, 3차 대유행으로 이어지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경제학과 사회학을 기반으로 한 통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빠르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독은 점점 더 세를 불려가는 현실이 되고 있다. 1905년엔 혼자 사는 미국인이 고작 5퍼센트에 불과했으나, 오늘날엔 그 숫자가 25퍼센트로 치솟았다. 영국은 인구의 3분의 1이, 프랑스는 이보다 약간 더 높은 인구가, 스웨덴의 경우는 인구의 절반이 혼자 산다. 그런가 하면 교도소, 정신병원 또는 요양원 등지에서 어쩔 수 없이 고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 모니터 또는 휴대폰 액정 화면 앞에서, 심지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두 귀를 이어폰으로 틀어막은 채 새로운 고독 문화를 만들어간다...” (p.184)
본격적으로 종합되고 검증되고 해석되어서 만들어진 디테일한 판단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이만치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특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기사들이 도배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호의가 현재의 3차 대유행으로 인하여 변형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보수 언론의 왜곡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시장이 이번 위기의 승자라고 인정하는 분야를 넘어서... 나는 이번 위기를 통해 새로운 수요로 부상한 분야들을 따로 떼어내 ‘생명경제’라고 명명하려 한다... 생명경제를 목표로 내거는 기업들은 대단히 많다. 건강, 예방, 위생, 스포츠, 문화, 도시 하부 구조, 주거, 섭생, 농업, 영토 보호뿐 아니라 민주주의 운영, 안전, 방위, 오물 처리, 재활용, 수자원 보급, 청정 에너지, 생태, 생물 다양성 보호, 교육, 연구, 혁신, 디지털, 상업, 물자 보급, 상품 이송, 대중교통, 정보와 언론, 보험, 저축, 신용 등의 다양한 분야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이 분야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계되어 있다. 건강은 위생을 전제로 하며, 디지털은 교육에도 유용하고, 섭생은 농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농업은 국토 구획 정리와 상업의 전면 개편과 무관할 수 없다. 또한 연구와 안전, 민주주의의 공고한 토대 없이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지속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pp.242~243)
책에서 자크 아탈리는 코라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짚어(보고 (열악한 보건 의료 상황, 무분별한 세계화, 인류 전체의 오만과 이기주의 등), 코로나의 진행과 연관된 현상을 살핀 다음 (인간의 고독화 경향, 인간과 인간이 만든 도구 사이의 역전 등), 코로나 이후 우리가 추구하기를 기대하는 바 (생명경제로의 전환, 기후 온난화 방지, 전투적 민주주의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전체주의가 꾸준히, 집요하게, 때로는 독재자를 앞세우지도 않은 채, 기존 체제를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특별한 경고도 없이, 자신들이 여전히 민주주의자라고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몇몇 정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우리 삶을 잠식해 들어올 것이다. 처음엔 신중하게 몸을 사리고 있을 몇몇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아무도 그런 이름으로 불릴 권리를 부인하지 않는 희한한 독재 체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p.275)
지금 당장의 어려움에 모두가 힘을 못 쓰고 있다. 이럴 때 누군가는 또 그 어려움 이후를 떠올려야 한다. 자크 아탈리는 그렇게 이후를 떠올리려 애쓰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책이 구체적인 실천서의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이후를 또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화두로 간직할만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든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되어야 유의미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 믿고 싶다.
자크 아탈리 Jacques Attali / 양영란 역 / 생명경제로의 전환 (L’économie de la vie) / 한국경제신문 / 335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