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없이 할만만 하면서도 어떻게든 전달하는 경외와 선의...
“서평은 보통 상당히 짧아서 1000단어 이하가 많고, 자연히 주제가 한정된다. 어느 정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판단을 표명하는 데 재량권이 많이 주어진다... 서평은 흥미롭고 부담스러운 글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나 다른 분야로나 더 넓은 문제들과 관련된 서평에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는 좋아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 (pp.11~12, <서문> 중)
나는 내가 책을 읽고 쓰는 글들을 서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서평에서(조차) 비판의 기능을 한 움큼 덜어낸 리뷰로 읽히면 그것으로 족해 한다. 아니다, 실은 내가 이렇게 써서 남기는 행위는 일종의 변형된 일기 쓰기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나에게 할애된 시간을 사는 것처럼 일상을 견디고, 내가 나에게 할애한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일기처럼 리뷰를 쓰는 동안 이 두 겹의 시간이 적당히 겹쳐지기를 원한다.
“...아무래도 나는 규칙적인 다양성이 있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꼭 사람일 필요는 없고, 적어도 낯선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다른 일······ 육체적인 일이 있는 게 좋다. 매일 정해진 때, 아니면 정해진 시간 길이 동안 요리하거나 청소하거나 정원 일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현 상황에서는 산책이 그런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멀리 걸어갈 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래서 조금 맥이 빠진다. 11시부터 온화하고 해가 비쳤다 구름이 꼈다 바람이 불었다 하는 야외에 나가 있는 건 아주 좋았지만, 딱딱한 포치에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팠다. 도마뱀은 두 마리 다 찾아왔다. 오늘 밤 저녁식사는 여기에서 혼자 먹을 것이다. 어젯밤에는 외출 중이어서 통화하지 못한 찰스에게 전화도 걸어 볼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설은 아주 느리고 상세하다······. 어쩌면 지나치게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에서 짧은 글, 아주 소품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붙잡고 있는 건 아무래도 굉장히 크고 긴 짐승의 꼬리 같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온화한 짐승 같은데, 거대한 도마뱀일까?” (p.520)
보다 본격적인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책의 말미에는 작가들을 위한, 여자들만을 받기에 독특한 칩거지로 알려진 헤지브룩에서 보낸 시간 동안 작성한 짧은 기록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실린 위와 같은 문장이 내가 쓰고자 하는 일기글에 한없이 가까워 보인다. 내가 하고 있는 쓰기와 내가 하고 싶은 쓰기 사이의 거리감을 언젠가는 좁혀 보리라 수시로 다짐하곤 한다.
“무서운 긴장감이 가득하고, 한 번 이상 무계획적인 살인이 터져 나오긴 하지만 이 소설은 결코 스릴에서 정당성을 찾지도 않고 폭력에서 해결책을 찾지도 않는다. 인간의 악의 힘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초기 정신 이상의 다양한 형태에 익숙했던 필립 딕은 무한한 불안정성의 혼란과 단 하나 견고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양쪽에 유혹을 느꼈다. 그 하나란 선의, 더없이 진부한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함이었다. 필립 딕의 포착하기 어려운 예술성은 우리가 어렵게 얻어 낸 선한 의도가 우리가 믿어야 할 전부인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길일 뿐인지에 대해 단언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등장인물들이 옳은 일을 하려는 부족하고 서툰 시도들을 이 비범한 소설의 중심 사건으로 읽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pp.224~225)
물론 보다 본격적인 리뷰 혹은 서평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집중하여 읽고 많이 집중해서 써야 할 것이다. 쓰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하고 되도록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를 참아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의 2015년 폴리오 소사이어티 판 서문에 작가가 쓴 위와 같은 문장이나 주제 사라마구의 여러 소설을 정리하며 작성한 작성한 아래와 같은 문장이 부럽다. 군더더기가 없이 할 말만 하면서도 책을 향한 혹은 작가를 향한 한 독자의 진정한 경외와 선의가 느껴진다.
“사라마구에게 감상주의가 없지는 않다.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대단히 희귀한 뭔가를 전달한다.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애정과 경탄을 허용하고, 맑은 시선으로 용서한다. 그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정신과 유머 면에서 최초의 위대한 유럽 소설가 세르반테스와 가장 가까운 작가인지도 모른다. 이성의 꿈과 정의의 희망이 끝없이 좌절될 때, 냉소주의는 쉬운 출구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농민 사라마구는 그 쉬운 출구를 택하지 않는다.” (pp.273~274)
책의 반절 정도를 이루는 첫 번째 챕터는 작가가 강연한 글을 다시 정리한 에세이 그리고 여러 군데 발표된 조각글로 채워져 있다. 여러 강연 그리고 에세이에서 작가는 SF 판타지를 (비록한 장르 문학을) 한 수 아래로 보는 리얼리즘 문학(장르 문학을 제외한 문학을 작가는 이렇게 부른다. 우리가 순수 문학 혹은 본격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에 반격을 가한다. 동시에 페미니즘에 대한 열의도 숨기지 않는다.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 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pp.190~191)
두 번째 챕터는 각종 책의 서문으로 작성한 글을 정리한 것이고 세 번째 챕터는 서평을 모아놓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나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을 향한 작가의 애정은 반가웠다. 토베 얀손의 《진정한 사기꾼》이나 켄트 하루프의 《이븐타이드》는 아직 우리에게는 번역 발간되어 있지 않아 아쉬웠다. 주제 사라마구는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되었고, 살만 루슈디의 《2년 8개월 28일 밤》은 읽어야하나 저어하게 되기도 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를 어떻게 읽나 생각해보세요. 우린 3000년 동안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그 속에 혼을 쏟고, 그 속에서 인간의 열정에 대한 교훈, 정의에 대한 호소,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발견했어요. 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교훈, 경고나 위로나 공동체의 기념으로 줄 수 있었던 의미를 훌쩍 넘어섰지요. 그 작품들은 예술의 원천이라는 신비와 심연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p.95)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 중 한 명인 작가의 소설은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는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 하나로 불린다.) 아직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으면서, 고양이를 다룬 산문집 한 권을 포함하여 (작가가 80세가 넘어 출간했다는 공통점을 지닌) 두 권의 산문집만 읽은 꼴이 되었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서, 라고는 할 수 없고 새로 나온 듀나의 소설 《평형추》를 지금부터 읽을 참이다.
어슐러 K. 르 귄 Ursula K. Le Guin / 이수현 역 /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WORDS ARE MY MATTER: Writing About Life and Books, 2000-2016, with a Journal of a Writer’s Week) / 황금가지 / 532쪽 / 2021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