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겪고 해석하고 수집하고 유추하고 퍼뜨린, 강아지 루실과 나의...
처음 강아지를 키운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진도가 고향인 사병이 휴가 복귓길에 새끼 진돗개를 한 마리 데려왔다.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언젠가부터 진돗개의 반출은 아주 까다롭거나 불가능해졌다.) 믿기지 않았지만, 진도를 떠나지 않으려는 습성이 너무 강해서 태어나 얼마 되지 않은 새끼를 진정시키기 위해 술을 먹여야 했다, 는 이야기가 있었다. 쪼르륵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삼남매에게 얼마나 커다란 이벤트였는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마음속의 어둠을 몰아내는 데 강아지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특히 나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강아지를 떠안게 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10분만 지나면 내가 지닌 모든 공허와 불안과 실존적 고민은 더욱 긴박한 자각에 밀려 구석으로 쫓겨났다. 그것은 내가 개에 대해 참담할 만큼 무지하다는 자각이다. 나는 강아지 기르는 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p.44)
너무 순하다고 혹은 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모님은 강아지에게 순돌이라는 이름을 안겼다. 진돗개는 그래야 한다면서 그 새끼 강아지를 집안에 들이지 않고 곧바로 문앞의 개집에서 살도록 했다. 순돌이는 어린 시절부터 용맹하였다. 특별히 담이 없는 우리집의 개집 앞으로 동네 도사견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옛날 도사견의 덩치는 송아지 정도는 되었다) 다가왔을 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옆집 발바리가 동생 발뒤꿈치를 무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개집에 묶인 목줄을 끊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어린 순돌이는 발바리에게 졌고 상처를 입었다.
“... 그들은 물질세계에 살고 우리는 정신세계에 산다는 현실에 맞닥뜨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우주는 즉각적 충동과 냄새와 소리와 쾌락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우주는 감정과 환상과 상징과 추상적 사고로 들어차 있다. 그들은 행동하고 우리는 해석한다. 이런 두 가지 존재 방식 사이에 혼란과 갈등의 바다가 출렁인다.” (p.84)
내가 중학생일 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진돗개를 아파트 내부에서 키우는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파트에서 바라다 보이는 작은 야산에 묶어 키웠지만 결국 키우는 것을 포기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순돌이는 없었고, 부모님은 우리에게 정확한 말씀을 해주지 않았다. 야만이 횡행하는 시절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발코니에서 순돌이가 있던 산자락을 향한 채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녀석의 배를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나는 루실이 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모른 채로 지내는 게 좋다. 개와 함께 사는 이런 미스터리가 좋다. 녀석과 내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순간,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넘어서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순간,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넘어서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순간, 상대가 무얼 원하고 느끼는 이해하는 순간은 분명히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소중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순간을 존중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영혼을 밝히는 일이다.” (p.142)
내가 대학생일 때 남동생이 작고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거두었다. 누군가 아파트 쓰레기장에 유기한 것을 동생이 덥석 안고 들어온 것이다. 며칠에 한 번씩 귀가하던 신입생 시절이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갔더니 그렇게 강아지가 있었다. 엄마는 강아지가 이쁘게 생겼다고 이쁜이라고 불렀다. 이쁜이는 엄마가 운영하던 식당으로 함께 출퇴근을 하였고, 동네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배가 불렀고 새끼를 낳았다. 남동생이 새끼들을 손수 받아냈다. 네 마리를 낳았고 세 마리는 입양했다. 한 마리는 남았는데 갈색의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어서 얼룩이가 되었다. 얼룩이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났고 이쁜이가 뒤를 따랐다. 그 뒤로 강아지를 더 이상 키우지 않았다.
“... 누군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건 달콤하고도 보편적인 환상이지만 다시 보면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다. 성인 남녀 사이에서는 실현될 수도 없지만, 어쩌면 실현돼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을 바라는 마음에 대해, 하지만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에 대해. 하지만 우리 배우자가 개처럼 아침마다 우리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우리가 방에 들어올 때마다 길길이 뛰며, 비판의 말 한마디 없고, 우리가 짜증을 내건 안달을 떨 건 게으름을 피우건 아무런 견책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우리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고 생각해보라. 언뜻 보면 아주 환상적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런 상황을 5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개들은 우리에게 사람은 못 주는 걸 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이 다른 종에 속하기 때문에, 게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공정함에 대한 질문도 일으키지 않고, 권력의 불균형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도 들쑤시지 않고, 우리를 갑갑함에 몸 비틀게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와 우리가 그토록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개들은 우리 환상 속의 친밀함과 현실 속의 필요(경계선과 자율과 거리에 대한 필요)가 가진 틈새를 채워준다.” (pp.247~248)
캐롤라인 냅은,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리지 않고 기록하는, 냉혹한 기록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남자보가 개가 더 좋아》는 그중,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기쁘고 좋은 일을 좀더 선사하는 강아지와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나는 루실을 사랑한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라고 말하는 작가가 직접 겪고 해석하고 수집하고 유추하고 퍼뜨린, 강아지 루실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캐롤라인 냅 Caroline Knapp / 고정아 역 /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 (Pack of Two) / 나무처럼 / 287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