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어둠이 인위적이어서 충분히 어둡지 못한...
나는 지금 서른 일곱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은 연예 기획사에서 오래 일을 했는데 신문 스크랩을 한다. 이제는 완전히 한물 간 행위인데 멈추지 않는다. 나는 가끔 남편의 스크랩을 들춰본다. 남편이 무엇을 스크랩하는 것인지 딱히 궁금해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행위를 한다. 소설 속의 내가 하는 행동은 많은 경우 그렇다. 행동의 당위보다는 행위의 전시로 소설은 진행된다.
“...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잘하거나, 내 마음을 잘 털어놓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만나는 건 좋아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 목소리, 몸짓.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힘을 얻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p.32)
이러한 주인공의 소극성은 주인공을 표현하는 작가의 방식에서 비롯된다. 주인공인 나는 나와 정반대인 누군가를 통해 살펴진다. 유추하여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나답지 않은 나를 통해 나다운 것이 무엇은지를 넘겨짚을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을 읽으며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답답함은 이러한 캐릭터 구축 방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나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이런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들이 나를 추동했고, 이건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을 멈출 수도 없었다.” (p.91)
나는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간다. 현재의 나는 얼마 전 엄마를 떠나보냈다. 엄마는 병상에 있는 동안 내게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작은 동네를 자주 떠올렸다. 그곳에서 엄마의 행동은 나의 행동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왜, 라는 물음이 엄마와 나 사이에 있던 과거의 여러 상황들을 읽는 동안 떠나지를 않는다. 그것이 단연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 나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싶었다. 친구들과 골목을 걷고, 낯선 자동차를 만나고, 그들에게 소름 끼치거나 사악한 제의를 받고 그걸 보기 좋게 거절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가 아니어도 좋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위험에 처했다가 스스로를 구출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p.161)
나중에야 이 모든 것들이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나름의 심리적이 복선임을 알게 되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엄마가 떠나온 섬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건드리는 몇몇 부분 또한 충분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실에서 사라진 한물 간 연예인 윤이소와 작은 동네의 외딴 집에서 기거했던 정치인의 내연녀였던 그녀의 이야기도 겹쳐 놓고 보기엔 조금 억지스럽다.
“잦은 멈춤과 주춤거림 끝에 이야기를 여기까지 이끈 아버지는 더 듣고 싶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손으로 벤치의 끝부분을 꽉 잡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론가로 떠밀려 가기라도 할 것처럼...” (pp.297~298)
전반적으로 자연스레 흘러가는 이야기에 천연덕스럽게 몸을 맡기기 힘들었다. 이야기가 어두운데 그 만들어진 어둠이 인위적이어서 충분히 어둡지 못하였다.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 집중할 것인지 결정이 되어 있지 않아 작가도 독자도 헤매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없지는 않으나 능숙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편이 아닌 장편에서 이런 문제가 더욱 분명해진다.
손보미 / 작은 동네 / 문학과지성사 / 314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