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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5. 2024

강이람《아무튼, 반려병》

잦은 병증으로 눈총을 받아온 이의 촘촘한 변명같은...

  다섯 살에 큰 화상을 입었다. 피부 이식이 필요한 만만치 않은 상처였고 입원 기간이 반년 가까이에 달하였다, 고 엄마에게서 들었다. 다섯 살이면 기억의 파편이 남아있을 법도 하지만 내게는 화상과 그 이후의 기간 어느 한 순간도 떠올릴 수가 없다. 여하튼 어린 나이에 그런 시련을 겪었으므로 나는 조금 특별한 취급을 당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나는 약한 아이로 치부되었고 약한 아이로 치부되는 상황에 큰 저항감을 갖지 않게 되었다.

  “... 약골(weakling)은 결과라기보다는 골골거리는 상태가 지속되는 진행형(weak+ing)이여서일까. 내 약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p.47)

  그렇다고 해서 잔병치레가 많은 어린 시절을 겪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야외 활동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고, 그러므로 당연히 피부는 허여멀건 한 편에 가까웠고, 몸무게도 또래에 비해 적게 나갔다. 잔병치레가 없었어도 나를 약해 보이게 만들기 충분한 조건들이었다. 열심히 떠올려보니 감기 정도는 충분할 만큼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체육 시간을 즐거워해본 적은 없다. 

  “사실 또 아프냐는 질문은 ‘네’, ‘아니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의문문의 탈을 쓴 명령문이다. 어떤 의도로 물어보았건 결론은 ‘그만 좀 아파!’라는 것인데 그 말이 아픈 이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된다. 왜냐하면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맨날 아픈 사람을 보는 것도 지치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귀찮고 짜증나지만 그런 내색을 대놓고 하기도 어렵다.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국 위로랍시고 던지는 말은 고작 ‘병. 원. 에. 가. 봐’, ‘그. 냥. 진. 통. 제. 를. 먹. 어’이다. 하지만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지시보다는 지원과 지지다...” (pp.71~72)

  서른 살이 넘어, 고원과도 같은 알콜릭 정점의 시기에 수영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약골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했다. 술로 마취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 몸의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신호가 발산되었다. 나는 때로는 모른 척 하고 때로는 심하게 아는 체 하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수영을 시작했다. 어느 날 종합운동장의 수영장을 찾았고 등록을 하고 수영복과 수모와 수경을 샀고 며칠 뒤부터 그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환자는 치료의 대상이면서, 회복의 주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다 한들, 결국 그 치료의 완성은 환자가 가진 자기회복능력에서 이루어진다. 치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의사겠지만, 회복의 문을 닫고 나오는 것은 환자의 역할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둘은 모두 ‘낫는 것’에 목적을 둔 하나의 공동체이다... 환자에게 모르는 게 약이 될 수 없다. 검사를 통해 병명이 나오기까지 환자들은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인 추론에 의해 모든 가능한 병들을 짐지게 되기 때문이다.” (pp.101~102)

  수영을 시작한 다음, 달고 살았던 감기는 사라졌다. 수영을 처음 시작하고 이 년 정도는 전혀 감기를 앓지 않았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감기를 자주 앓지는 않는다. 수영의 호흡이 저절로 비강 청소를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뒤로도 술을 줄이지는 않았고 마흔 중반에 결국 크게 탈이 생기고 말았다. 완치는 없고 관해만이 가능한 병을 떠안고 살게 되었다.

  “과거에는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로 정의했다고 한다. 완벽주의적 발상에 기반해 인간의 몸은 본래 무결한 상태라고 가정했던 것 같다.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건강을 정의하는 다양한 개념이 연구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의한 건강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농부가 심은 사과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해가 뜨면 햇볕을 쬔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스치면서 그렇게 익어간다. 농부는 사과 안의 비타민과 무기질을 설계하거나 사과의 빛깔을 정할 수 없다. 그저 계절에 맞추어 물을 더 주고 가지치기를 하면서 도울 뿐이다. 그 과정을 통해 사과는 사과다워진다. 완벽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건강의 정의이다...” (pp.143~144)

  《아무튼, 반려병》은 잦은 병증으로 눈총을 받으며 살아온 이가 그러한 자신을 변명하는 글이다. 하지만 ‘반려병’이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 자신의 병증을 촘촘하게 들여다보면서 작성한 수기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병증들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다면, 그래서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면 내치기보다는 제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지는 명칭이다. 뭐, 골골 백년이라고 했으니...

강이람 / 아무튼, 반려병 / 제철소 / 159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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