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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4. 2024

송지현《동해 생활》

어쨌든 튜브 하나는 챙겨갈 예정인 어떤 여행을 예감하며...

*2021년 1월 1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올해 아내의 리프레시 휴가가 있다. 재작년 베트남을 다녀오면서 그리고 작년 강릉을 다녀오면서 그 휴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대략 열흘 정도 어딘가에 머물 생각인데, 재작년에는 그것이 동남아 어딘가였지만 작년에는 동해와 제주도 중 한 곳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가능할까, 의구심을 품게 되었지만 어쨌든. 책은 그렇게 두 곳 중 한 곳인 동해, 에서의 생활, 을 다루고 있다. 


  『... 스물한 살의 나는 그 아파트에서 일 년간 살았었다. 휴학을 하고 글을 쓰겠다며 동해로 내려가서는 매일 같이 「프렌즈」와 「섹스 앤 더 시티」만 봤다... 친구와도 잠깐 같이 살았는데, 둘 다 글을 완성해서 투고하겠다는 말만 하고 매일같이 와인이며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럼에도 친구는 꿋꿋이 초고를 완성하여 투고까지 했는데, 결국 당선되지는 않았다. 나는 당연히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다. 성과라고는 단 한 톨도 없는 나날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 ‘나의 현자’ 권민경은 또다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예전에 같이 살았을 때 기억나? 그때 학교 담벼락에 기대서 밤새 귀신 얘기하고 그랬잖아. 우리는 앞으로 살면서 그 담벼락을 다시 찾아야 할 것 같아.”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동해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pp.24~25)


  얼마 전에 어떤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은 작가의 소설에, 그 터무니없이 경쾌한 문장에 혹하여 《동해 생활》을 덥석 읽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겸사겸사... 사실 작가의 무모한 경쾌함이나 무심한 유쾌함 뒤에는 (우리가) 억지로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어두운 구석들이 있다. 눈치를 챌 수도 있지만 굳이 아는 체를 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얼른얼른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 구석들 말이다. 


  『... 새로 간 병원이라 초진을 하고, 당연히 상담을 하며 울었고, 의사는 검진 결과를 말하기 전에 내게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다.

“심하지도 않은 우울증으로 찾아와서 비웃음당할 것 같아요.”

의사는 웃었고, 나도 울다가 따라 웃었고, 그는 다시 웃지 않는 얼굴로, 현재 매우 우울한 상태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를 전해 주었다. 나는 다시 항우울제를 복용하기로 했다.』 (pp.17~18)


  책에서 그려지는 동해에서의 생활이 꿈만 같았다, 라고 하면 좋았겠지만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는 작가의 동생의 사진 몇 장은 꿈처럼 좋았다) 도착 후 내내 잠만 잤으니 꿈만 같았을 수도 있지만, 잠시 꿈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거리가 멀다. 충분히 나른해 보이기는 하였다. 나의 이십대의 중심에, 핫도그 속 소시지처럼 박혀 있던 나른함과 많이 닮아 있어서 굉장히 반가웠다. 


  “... 동해에 온 뒤 한 달은 내내 잠만 잤다. 잠깐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잠들고 그게 다였다. 그러다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고 동해에 왔다. 내가 잠자는 만큼 동생도 잤다... 우리는 그렇게 실컷 자다가 어느 날 일어났다. 일어나서 밀린 일을 했다. 실업 급여도 신청하고 강릉까지 영화를 보거 가거나 맛집 탐방을 했다. 그리고 매일 집 앞 바다에 나갔다. 정수리 바로 위에 떠 있는 햇빛을 맞으며 웃을 때면 우리 얼굴에는 그림자가 일렁댔다. 얼굴에 파도가 새겨지는 것 같았다. 잔잔한 봄이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여름이 왔다. 기온이 올라가니 갑자기 기운이 생겼다. 그때부터 친구들을 초대하고 망상 해수욕장에서 열리는 록페스티벌에도 갔다... 여름 동안 우리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일어나서 씻지 않고 간단하게 밥을 먹는다. 수영복을 입고 수건과 선크림을 챙겨 바다로 간다. 튜브를 대여한다. 물에서 놀다가 추워지면 물 밖에 나와서 체온을 올리고 다시 물에 들어간다. 집에 돌아와 모래가 잔뜩 낀 옷을 빨고 샤워를 한다. 간단한 밥을 먹는다.

친구에게 말하니 문학 작품에서나 보던 ‘남프랑스적인 삶’이라고 했고 그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그 말이 서울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동해로 떠나온 선택에 대한 긍정의 대답처럼 들렸기 때문일 거다. 동생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지.” (pp.179~182)


  몇 차례 동해에 다녀온 적이 있고, 그 순간 함께 한 사람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계획을 하고 떠난 적도 있고, 무작정 떠난 적도 있고, 떠난 줄도 몰랐는데 동해였던 적도 있다. 젊었을 때도 갔고 작년에도 갔다. 그 모든 날들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쨌든 이유가 있는 날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되돌아갈 수 없어 안타깝지는 않다.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됐다.


  “어디선가 본 글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아내가 죽은 뒤 모든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버릴 수 있었는데, 함께 휴가 가서 쓴 튜브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고. 바다에서 열심히 불었던 그 튜브 안에 아내의 숨결이 들어 있을 생각을 하니 그게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 (p.183)


  사실 어딘가로의, 잠깐의 여행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작가의 동해에서의 생활처럼 생활과도 같은 긴 여행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도 큰 관심은 없지만, 작은 관심 정도는 갖게 되었다. 아내가 그런 여행을 크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어디로 떠날 것인지 결정된 것은 없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이번 여행에는 튜브를 하나 챙겨갈까 한다. 내가 불든 아내가 불든, 언젠가는...



송지현 / 동해 생활 / 민음사 / 286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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