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기 그지없는 헛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뒤로 하고...
*2020년 8월 2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자 인간의 욕망은 다시 꿈틀거리고 그 욕망은 코로나를 뛰어넘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이미 가진 자들의 그것과 아직 갖지 못한 자들의 그것이 뒤엉키고 그로 인한 현 정권의 위태를 보며 현재의 야당이 죽은 듯 숨죽여 치열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때 그 숨죽임에 코웃음 치며 거짓 선지자와 거짓에 목마른 중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우리는 코로나의 또 다른 형국 그 초입에서 아비규환과 도탄으로 아스트랄한 세상의 한 복판에 서있게 되었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는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p.271)
작가 김훈이 바라보는 세상이라고 – 그것이 지금이든 이전이든 – 무어 크게 다를 리가 없을 테니, 책의 뒤에 붙인 위와 같은 작가의 말이 크게 새삼스럽지 않다. 세월호의 비극에 말을 보탰던 작가가 최근 천착하였던 밥벌이를 향한 노동자의 죽음, 그러나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그 현상에 절망한 작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속의 세상으로 귀의하는 것을 이해할만 하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 물건이 아닌 것이 끼어드는 더러움을 초의 선왕들은 경계했고, 돈몰한 목왕도 그 가르침을 받들었다. 금붙이로 곡식이나 땅을 사고팔게 되면 곡식도 땅도 아닌 헛것이 인간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헛것에 홀려 발바닥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서 흘러가게 되고, 헛것이 실물이 되고 실물이 헛것이 되어서 세상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입으로 맛볼 수 없는 빈 껍데기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왕들은 근심했다.” (pp.193~194)
그 세상은 사람과 말이 관계를 맺고 산으로 떠나는 신화의 세계와 같고, 말과 말이 관계를 맺고 달을 향해 해를 향해 뛰어다니는 야만의 세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는 초나라의 『시원기』나 단나라의 『단사』가 등장하는 문명의 세계이다. 성을 쌓고 그 안에 웅크리는 단나라가 문명인 것도 아니고 강을 건너 모든 축조물을 허물어뜨리는 초나라가 야만인 것도 아니며 백산으로 들어간 초나라의 둘째 아들 연과 무녀는 또 다른 신화일 수도 있다. 신화와 문명과 야만은 그렇게 넘나든다.
“초원에서 비혈마의 무리들이 지는 해를 향해 일제히 달려간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나하 북쪽, 초의 신월마들이 초승달을 향해 달리던 까닭도 알 수 없다. 저무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말들의 넋을 잡아당겼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게으른 소리다. 그것은 말들만이 안다.” (p.72)
현재와 과거의 어느 한 역사를 오가던 김훈의 소설은 한바탕 지랄 같은 세상에 환멸을 느낀 것인지 좀더 뒤로 물러섰다. 김훈의 문장을 통해 신화와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싸우고 살고 죽는 사람과 말은 생명을 얻고 빼앗긴다. 그곳은 어디에 기댈 것이 없는 철저히 허구여서, 그저 작가의 문장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다. 칼이 적 앞에서 헛돌았을 때 나의 전 방위는 적의 공세 앞에 노출된다. 이때 수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적의 창이 내 몸에 꽂힌다. 나의 공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고 적의 수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적 또한 이와 같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그러므로 공에서 수로, 수에서 공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 엎어지고 뒤집히는 틈새를 사람의 말로는 삶이라고 부른다고 『시원기』에 적혀 있는데, 수네 공이네 죽음이네 삶이네 하는 언설들은 훨씬 게을러진 후세에 기록된 것이다...” (pp.22~23)
그렇대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 책 앞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며 소설을 읽는데, 소설 속 인물들의 이동 거리와 시간이 자꾸 지도에서 확인되는 거리와 부딪친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면 여기서 여기까지 이 개월이 걸린 것이 맞나 의심스러워진다. 오래전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등장인물인 수사의 대화를 적으며, 수사의 걸음 속도와 대화의 지속 시간과 회랑의 전체 길이를 계산하였다고 하던데...
김훈 / 달 너머로 달리는 말 / 파람북 / 271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