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끝으로 만들지 않는 신산한 여운의 경험...
작가와 연관하여 앨리스 먼로가 언급되기에 급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루시아 벌린의 단편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이 한 번 더 축약된 형태라고 보면 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이 드라마라고 한다면 루시아 벌린의 단편은 시트콤에 가깝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더 짧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는 엇비슷하다. 읽다보면 조금 정신이 없기도 하다. 여하튼 앨리스 먼로와 루시아 벌린이 어느 정도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노래를 불렀다. 카산드라는 도중에 빨래방에 들러 세탁물을 수거해 담아 무거워진 카트를 밀고 가다가 우체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를 보지 못한 터였다. 카산드라는 느릿느릿 그의 뒤를 따라 건널목 쪽으로 갔다. 그러다 카트를 잡은 손을 놓았는데, 무거운 카트가 경사진 보도를 그대로 굴러가 그의 발뒤꿈치에 부딪쳤다. 그가 발을 뗐고, 그러다 한쪽 신발이 카트에 걸려 벗어졌다. 그는 증오하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고는 몸을 굽혀 끈을 푼 뒤 신발을 다시 신었다. 카산드라는 카트 손잡이를 다시 잡았고, 그는 횡단보도로 걸어 들어갔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반쯤 건너갔을 때 빨간불 신호가 떨어졌다. 그리스티디스 슈퍼마켓의 배달 트럭이 코너를 돌아오다가 우체부를 칠 뻔하고 끼이익 브레이크를 걸어 겨우 멈췄다. 우체부는 겁에 질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이내 길을 마저 건너가더니 13번가를 따라 달렸다.” (p.14, <벚꽃의 계절> 중)
루시아 벌린을 읽으며 앨리스 먼로를 떠올리는 데 주효한 것은 소설의 결말 부분이 보여주는 모호함들이다. 등장인물들의 사정이 나열되지만 어떤 판단을 통해 작가가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 작가의 역할은 잘해야 그 혹은 그녀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그 상황은 또 다른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도이고, 그저 툭 하고 끝내버리는 상황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할머니와 나는 식당에서 성경책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직 잠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
“왜요?”
“알 거 없다.” 나는 잠들었고 할머니는 나를 침대에 데려다 뉘었다.』 (p.65,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중)
그러니까 이런 식인데, ‘알 거 없다’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할머니를, 작가는 닮은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독자들은 시크한 할머니를 둔 손주가 되어 괜스레 안달복달 하게 된다. 대체 할머니는 무슨 연유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저런 이야기는 어떤 까닭으로 이어지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친절한 할머니는 아닌데, 어떤 이야기를 툭 던질 때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 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라고 한다. 또는 어떠어떠한 때가 오면, 또는 일단 나에게 무엇무엇만 있으면, 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다면 내가 행복할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p.218, <낙원의 저녁> 중)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이나 사랑이나 죽음이나 연인이나 이웃이나 그저 스쳐 지나간 이나 아예 모르는 이들까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지금의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숏폼, 이라고 불릴만한 일종의 엽편 소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희귀하다. 어떻게든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짧은 글로 끝나지 않는다. 그 끝을 끝으로 만들지 않는 여운의 경험 또한 희귀하다.
“가을이 되었을 때 폴이 뉴욕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은 밴과 렌트한 트레일러에 이삿짐을 실었다. 피트와 프랜시스와 로물로는 그날로 본채를 차지했다. 그들은 마야가 탄 차가 출발해서 멀어져갈 동안 연신 손을 흔들었다. 마야도 손을 흔들다가 눈물을 흘렸다. 화초와 농작물, 붉은어깨검정새들, 친구들. 마야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몇 년 뒤에 죽었고 피트와 로물로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그들은 이제 모두 늙은이가 되어 나무 아래 앉아 맥주를 마시며 도미노게임을 하고 있다. 코랄레스 로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백 년도 더 된 근사한 흙별돌 고택. 능소화가 붉게 타오르고 사방에 장미꽃이 핀 집이 바로 그 집이다.” (pp. 203~204, <양철 지붕 흙벽돌지> 중)
아무래도 신산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이력이 이처럼 툭툭 던지듯 하는 이야기라는 형식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네 아들의 육아와 알코올 중독, 암으로 죽은 여동생과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엄마와 같은 배경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켜켜이 묻어 있다. 그 인물들을 관통하면서 루시아 벌린은 글을 썼고, 어린 시절의 척추 관련 질병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산소탱크에 의지하여 살았으며, 2004년 숨을 거두었다.
루시아 벌린 Lucia Berlin / 공진호 역 / 내 인생은 열린 책 (Evening in Paradise) / 웅진지식하우스 / 375쪽 / 2020 (1981~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