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타입이 제공하는 화음의 여운 안에서...
「런어웨이」
“제이미슨 부인과 관련하여 자신이 얽혀든 난장판이나 클라크와 벌이고 있는 딱하기 그지없는 시소 놀음에 비하면 플로러를 잃어버려서, 아니 어쩌면 영영 못 찾을지도 몰라서 느끼는 단순한 고통은 차라리 위안거리에 가깝게 느껴졌다. 적어도 플로러가 떠난 것은 칼라 자신이 저지른 잘못 탓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p.29) 칼라가 제이미슨 부인 그러니까 실비아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실비아는 얼마 전 남편을 잃었고 슬픔을 감내한 여행 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칼라는 남편인 클라크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로 인해 미망인이 된 실비아를 협박해야 하는 처지이다. 칼라와 클라크가 키우던 염소 플로러가 사라진 것은 바로 그즈음이다. 소설은 남편으로부터 심리적 학대를 받고 있는 여인 칼라가 이웃 여인인 실비아의 도움을 받아 생애 최초의 자발적인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포기하고 마는 일종의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짧은 후일담으로 염소 플로러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그러니까 칼라는 돌아왔지만 플로러는 영영 사라졌다. “폐 속 어딘가에 아주 뾰족한 바늘이 있는 것만 같았지만, 숨을 조심스럽게 쉬면 통증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심호흡을 할 때면 바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그녀를 아프게 했다.” (p.72)
「우연」
“곧이어 그에게 아까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자가 몸을 숙이고 자리 있느냐고 물은 일이며, 그가 자리에 앉은 일, 그녀가 계속 창밖을 내다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책을 읽어보려고, 혹은 읽는 척하려고 노력한 일이며, 남자가 줄리엣에게 기차를 어디서 탔느냐고 물은 일, 그녀의 집을 알아낸 일, 대화를 이어보려고 계속 말을 걸어서 급기야 자신이 남자를 두고 나가버린 일까지 모조리.” (p.105) 여기에서 그는 에릭이고 남자는 그 기차에서 내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것은 6개월 전의 일이고, 줄리엣은 지금 에릭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에 회상 장면이 길게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줄리엣이 찾아간 에릭은 이제 막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아내를 떠나보낸 참이고, 그에게는 두 명쯤의 여자가 이미 있는 상태이다.
「머지않아」
<우연>을 비롯해 <머지않아>와 <침묵>은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우연>에서 에릭을 찾아갔던 줄리엣은 <머지않아>에서 13개월이 된 딸 퍼넬러피를 데리고 자신의 친정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부모를 돕는 아이린이 있다. 아이린에게는 어린 아들과 달이있고 남편은 죽었고 줄리엣보다 세 사실 어려 스물두 살이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방문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가 ’머지않아 줄리엣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줄리엣은 대꾸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정말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그럼요‘라고만 하면 되었을 텐데. 줄리엣 자신에게는 사소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엄마한테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었을 텐데. 하지만 줄리엣은 그대로 돌아섰고 쟁반을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찻잔을 씻고 물기를 닦아냈다. 목사가 들이켰던 탄산음료가 담겨 있던 유리컵까지도. 줄리엣은 모든 것을 치워버렸던 것이다.” (pp.191~192) 몇 달 후에 줄리엣은 그곳을 다시 방문해야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침묵」
줄리엣은 방송에 출연하며 어느 정도 얼굴이 팔린 인물이 되었다. 딸 퍼넬러피는 스무 살이 넘었는데 지금은 어느 종교 단체로 의심되는 곳에 가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 퍼넬리피가 그려준 약도를 보고 찾안 교회에서는 퍼넬러피가 떠났다며 어디로 간 것인지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퍼넬리피가 어렸을 때 에릭은 이미 죽었다. 배를 타고 나갔다가 훼손된 주검으로 해안가에 떠밀려왔다. 동료 어부들에 의해 바닷가에서 화장되었다. “이런 것이 애도로구나. 시멘트 한 포대가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 버스에 오르고, 버스에 내리고, 집까지(대체 왜 여기서 살고 있는 거지?)반 블록을 걸어가는 일이 마치 절벽을 오르는 것만 같다. 퍼넬러피한테 이런 기분을 들켜선 안 된다.” (pp.224~225) 에릭의 죽음을 실감한 것은 함께 살던 웨일 베이의 삶을 접고 밴쿠버로 이사를 하고나서 한참 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퍼넬러피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빠 때문이지, 그렇지?” 그렇게 보냈던 시간이 있고 지금 퍼넬러피는 사라진 상태이다. 줄리엣은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친구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어떤 이가 어떤 도시를 방문했다가 퍼넬러피를 만났다고 알려준다. 퍼넬러피도 그 도시를 방문한 참이었다. 어떤 이는 줄리엣과 퍼넬러피가 연락 두절 상태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퍼넬러피에게 줄리엣의 안부를 물었다. 지금 줄리엣은 ’고분한 복이나 자연스러운 치유 같은 것을 바라듯‘ 퍼넬러피의 연락을 바라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열정」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레이스는 한기를 느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진지한 줄 알았는데 이런 대답들로 그에게 잘 보이려 기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도 그 못지않게 세상 경험이 많은 척하려 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그런 와중에 최악의 진실까지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진실되고 현실적이며 지속적인 희망이 부재한다는 것이었다.” (p.292) 그레이스는 트래버스가의 두 인물 중 모리의 호감을 샀다. 그의 호의 때문에 종종 트래버스가를 찾았다. 하지만 어느 날 닉의 차를 타고 길을 나서게 된 어느 순간으로부터 모든 것은 어긋났다. 하지만 그것이 어긋남인지 아니면 바로잡음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중간 지점에 어떤 열정이 있었고...
「허물」
“로렌에게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흥미를 가지고 세상을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항상 두 눈을 크게 뜨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게 내재하는 가능성을 보는 것, 인간성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로렌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깨어 있으라는 것.” (pp.306~307) 로렌은 해리와 에일린 부부의 아이이다. 로렌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다가 델핀이라는 여인을 알게 된다. 로렌이 태어나기 전 해리와 에일린 사이에 있었던 일 혹은 아이 그리고 델핀의 정체가 소용돌이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조금씩 위쪽으로 솟아 오르는 것만 같다.
「반전」
소설의 첫 문장은 “죽어버릴 거야.”라는 로빈의 말이다. 그리고 이어 덧붙인다. “그 드레스 내일까지 준비해놓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소설은 로빈의 이 두 마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과 정확히 (반절만) 겹쳐진다. 하지만 결국 그 드레스는 준비되지 않았고, 일 년여의 시간 동안 부풀대로 부풀었던 로빈의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셰익스피어를 보고 대비했어야 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보면 쌍둥이가 혼동과 재앙의 원인인 경우가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한 반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머물게 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미스터리도 풀리고, 장난도 용서받고, 진정한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감정도 다시 불타오르게 되고, 놀림감이었던 자들은 아량을 베풀어 불평하지 않는다.” (p.402)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반전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힘」
이야기는 1927년 3월에 시작된다. 낸시는 윌프의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을 하기로한다. 신랑의 들러리로 윌프의 사촌인 올리가 나타나고 낸시는 올리에게 친구인 테서를 소개한다. 테서는 보지 않고도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맞출 수 있었고, 올리는 젊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낸시가 결혼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신혼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올리와 테서는 낸시의 곁을 떠난다. 시간이 흘러 낸시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병원에서 테서를 만난다. 1968년의 일이었다. 테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올리가 죽었을 것이라고, 살아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1970년대 초, 예순일곱 살이 된 낸시는 우연히 올리를 만난다.
“지금까지 내내 그녀는 올리가 한마디라도 진실을 말해주길 기다렸다. 오늘 오후 내내, 또는 어쩌면 거의 일평생 동안을. 그녀는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한마디 진실을 내뱉었다.
아냐.
그 말은 그녀가 미처 하지도 않은 제안에 대한 거절이었을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오만하고 비위에 거슬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에게는 솔직하고 다정하게 들렸고 그 당시에는 지금까지 들어본 그 어떤 말보다도 이해심이 가득 담긴 말처럼 들렸다. 아냐.” (pp.493~494)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곱씹는 맛이 있다. 정교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뭔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내는 맛이 아니라, 뭔가 딱 맞아떨어짐에도 그것이 발생시키는 화음의 여운에 한동안 휩싸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이게 정말 죄선의 번역인가, 몇 차례 의심을 했다는 사실은 실토해야겠다. 그리고 따뜻한손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이제는 절판된 《떠남》을 중고서적으로 구매해볼 참이다. 그 책에는 <허물>, <반전>, <힘>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들이 실려 있다.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황금진 역 / 런어웨이 (Runaway) / 웅진지식하우스 / 507쪽 / 2013, 202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