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혜영 외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뻔하거나 모호하거나 애매한 채로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by 우주에부는바람

편혜영 「호텔 창문」

“운오는 결코 형이 죽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간혹 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그럴 이유가 충분했지만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던 형이 자신을 살린 것을 알고 운오는 구역질을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난 것에 감사를 느끼기에는 아직 어렸다...” (p.27) 소설 속 운오를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요시오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요시오는 준페이가 목숨을 던져 살려낸 소년이었고, 이제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매년 준페이의 기일이면 그 가족을 찾아온다. 그렇게 운오는 죽은 사촌 형의 동네를 찾아오고, 그곳에서 사촌 형의 친구를 만난다.


김금희 「기괴의 탄생」

“선생님은 그 관계가 미뢰를 자극하는 쇄말적 맛이고 눈물콧물을 빼는 통속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다소의 부끄러움도. 선생님은 그런 일을 벌여놓고 감당이 되지 않는 듯 속내를 흘리고 다녔는데, 자기는 나를 포함해 소수에게만 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제자들 상당수가 알고 있었다...” (p.40) 대학원생과 사귄 선생님은 이후 자신의 감정의 ‘순도’를 증명하기 위해 이혼을 했고 그런 선생님을 나는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왜 ‘개하고 잤어요?’라고 물었고, 나중에는 ‘선생님의 그것을 모욕’했다고 사과했지만 그런 나를 향해 선생님은 ‘내 무엇을 모욕했지?’라고 반문하였다.


김사과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 그녀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하지만 절정에 이른 이야기를 한비는 무자비하게 중단하며, 앗 약속이 있는 것을 깜빡했네, 역시 절정에 이른 이수영을 다 녹아버린 빙수와 함께 버려둔 채 떠나버렸다. 버림받은 이수영은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구름에 둥둥 뜬 심정으로 백화점을 빠져나와 무채색의 압구정 거리를 헤매 다녔다... 마침내 그녀가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몸을 숙이고 서둘러 뛰었다. 때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고, 이수영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밖은 순식간에 흥건히 젖은 물의 세계가 되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버스는 잠수함처럼 전진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이수영은 반쯤 넋을 잃은 채였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도대체 오늘 그녀와의 만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pp.81~82) 이수영과 한비가 운명적으로 만나던 날을 이수영은 ’계시의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십수 년 간의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첫 번째 만남의 날 만큼이나 흥미롭다. 어쨌든 이수영은 에술가가 되었고, 그녀는 한나의 결혼식 날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되는데... 예술가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소소한 리포트 같은 것일까.


김혜진 「자정 무렵」

“사람들은 우리 곁에 나란히 서 있다가, 한꺼번에 갑자기 몇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서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갑자기 우르르 몇 계단 아래로 내려선 다음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들보다 아래였다가, 위였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와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로는 사람들 같다.” (p.121) 여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가사 공동체라는 구성은 유난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구성원인 우리를 향하는 시선은 아직 유난스럽다.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당시 나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생의 뺨을 때리고 말도 없이 사라진 동료 선생 대신 그 일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다른 선생님이 올 때까지는 수업을 하겠다고 말하자 원장은 갑자기 가발을 벗어 던지며 옆, 옆, 옆 교실에까지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씨발 년아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푼 모양이었다. 나는 좀 놀라긴 했지만 요즘 같은 때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담담히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새벽 원장은 내게 미안하다며 다른 선생을 구할 테니 2주 정도만 더 수업을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틀 뒤부터 사람들이 면접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새 선생님이 결정되었고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마디 인사만 나누고는 짐을 뺐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서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pp.132~133) 문체가 무척 마음에 든다.


조남주 「여자아이는 자라서」

“소장으로 간사로 고문으로 다시 소장으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상담소에 바칠 것 같던 엄마는 한순간 모든 것을 놓았다. 주하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주하를 가졌고 엄마 말처럼 아직 젊고 할 일이 많았다. 엄마는 갓난아기를 안고 동동거리는 딸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쉬려고 했다는 엄마의 말을 나는 애써 믿었다.” (p.171) 엄마와 그 딸인 나와 나의 딸인 주하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이야기라고 부르기엔 이야기가 작지만 여하튼... 나에게 편리한 방식으로만 애써 믿는 이야기라는 것이 어째서 여인에게서 여인에게로만 이어지는가, 하는 의구심을 문제 제기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최은미 「보내는 이」

진아 씨와 나의 아이는 이름에 똑같이 윤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윤이들은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고, 나는 때때로 진아 씨의 집에서 윤이들이 놀고 있는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나는 나의 달 하윤이가 진아 씨의 딸 서윤이가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진아 씨에 대한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도통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편혜영, 김금희, 김사과, 김혜진, 이주란, 조남주, 최은미 /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은행나무 / 220쪽 / 2019 (201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함정임 《사랑을 사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