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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6. 2024

지수 《아무튼, 하루키》

누구보다 빠르고 광범위한 독자로 삼십여 년을 살아내고 있는...

  동생네는 작은 대여소를 열어도 될 정도의 만화책을 소유하고 있다. 십수 권에서 수십 권에 이르는 단행본으로 발행된 일본 연재만화들이 많다. 얼마 전 동생의 아내는 가끔 무료할 때 이미 읽은 만화들을 다시 읽는데, 한 번 집어 들면 그 많은 만화들을 다시 직진으로 끝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에 즐거우면서도 괴롭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나한테는 아무래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런 것 같다고 답했는데, 동생의 아내는 그게 무슨 말인가요 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열다섯 살 중학생을 매료시킨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스타일이었다. 따분하다는 이유로 25미터 풀장을 가득 채울 분량의 맥주를 마시고, 함께 잤던 여자들에 대해 담백하게 말하고, 그러면서 때때로 철학적인 대사도 빼놓지 않고 읊조리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은 당시의 나에게 ‘쿨한 대학생’ 그 자체로 보였다. 눈을 감으면 언제 어디서나 고베의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소설이었다. 청춘의 한복판에 서보기도 전에 청춘을 한바탕 겪은 듯한 느낌을 맛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그 습하고 나른한, 떠올리면 조금은 슬퍼지는 세계를 나는 사랑했다.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의 과거처럼 그리워했다. 그렇게 나는 이 책과 함께 십대의 한 시기를 통과했다.” (pp.11~12)


  오류 투성이의 기억이지만 리플레이 시켜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산 곳은 신촌의 홍익문고이고 책을 읽은 것은 1991년이거나 1992년이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거기서 멀지 않은 때에 읽었다. 대학 입학 이후 줄곧 내게 있어 주류 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국내의 민족문학이나 노동문학이었고, 나는 국외로 시선을 돌려보았자 리얼리즘문학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느닷없는 널뛰기 독서였다. (어쩌면 우리 문학은 이 무라카미들을 징검다리 삼아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1994),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 등으로 건너간 것인지도 모른다)


  “내밀한 소통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홀로 침대 위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운명처럼 일본 대학의 수업 교재도 바로 그 소설이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에서는 한 장(章)씩 진도를 나갔고, 나의 원서 읽는 속도는 거북이처럼 느렸기 때문에 내게는 언제나 읽어야 할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베란다 쪽으로 바짝 붙인 침대 위에서 500엔인지 1000엔인지를 주고 사 온 분홍색 체크무늬 매트리스 커버의 거친 질감을 느끼며, 더러는 콘크리트 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물둘의 내가 반쯤 누운 자세로 하루키를 읽는다. 맥락을 따라잡지 못해서,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르는 단어가 섞여 있어서 애매한 미소로 알아들은 척 흘려보내고는 했던 일본 친구들과의 대화와는 달리 하루키의 문장은 언제까지고 나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직한 개처럼, 끈기 있는 스승처럼, 배신하지 않는 연인처럼.” (p.24)


  투 무라카미(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그렇게 불렀다)는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읽히는 일본 현대문학 작가군의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요시모토 바나나나 야마다 에이지 등이 뒤를 이었다. 책에서도 거론되는데 이들 중 지금까지 처음의 영향력을 유지(를 넘어) 발전시킨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일하다. (나머지 작가들의 자리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등의 장르 문학 작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하루키는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했고, 어쩌면 나 역시 하루키를 편파적으로 사랑해서 그의 신간이라면 무조건 구매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작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일본 문학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를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끔 쓸쓸하게 느껴진다. 같은 쓸쓸함을 하루키에게서만은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오랜 팬으로서의 내 솔직한 심정이다.』 (pp.54~55)


  그러고 보니 나는 (몇몇 책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보다 빠른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자였다. 그만큼 광범위한 독자이기도 해서 하루키의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들도 두루 읽었다. 최초의 몇 년간은 길티 플레져 같았던 애증의 독서를 유지하기도 했다. 엄숙함 속에서도 이율반적으로 자유주의에 경도된 운동권 세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무장한 PC 통신 세대로의 이행기를 그의 책들과 같이 했다. 


  “한 작가의 소설을 어릴 때부터 읽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다. 그것이 결국 이상형 형성에까지 영향을 주니까. 하루키의 소설에서 그런 인물 묘사를 보면 내 머릿속에는 여지없이 ‘이런 사람 어디 없나?’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은근히 흔할 것 같은 그런 이들이 내 주위에만은 마치 멸종 위기종처럼 드물다. 다 떠나서 남자 사람 지인이 파스타를 만드는 광경조차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후배의 애인이나 친구의 팀원 중에는 간혹 그런 유니콘이나 해태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요리한 파스타를 내가 먹어본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높은 확률로 없을 터이니, 말하자면 내게는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슈뢰딩거의 파스타남인 셈이다(왜 이렇게 파스타 타령인가 하면, 이것도 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이 책 저 책에서 파스타를 만들어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과 데이트 한번 못 해보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내버린 나로서는 상상을 통해서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p.61)


  그럭저럭 삼십여 년차 정도의 무라카미 하루키 독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책을 번역 출간하는 것인지 (그만큼 많은 책을 쓰니까 그렇겠지) 《아무튼, 하루키》를 읽으며 내가 읽지 않은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카트에 추가했다. 동생의 아내와의 대화로 돌아가, 이 엄중한 시기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아무튼, 하루키》를 읽고 나서, 작가의 소설 《1Q84》(2009)를 다시 꺼내 들었다. 고작 세 권짜리 소설이니 수십 권의 다시 읽기가 태반인 동생의 아내와는 비교할 게 아니다.


이지수 / 아무튼, 하루키 / 제철소 / 167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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