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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6. 2024

정혜윤 《아무튼, 메모》

무수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의 세계, 아뿔싸 메모 전성시대...

  포켓 사이즈의 몰스킨 노트를 가지고 있는데 (페이지를 다 채우지 못하고) 몇 년째 사용 중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노트가 없을 때는 급하게 A4 용지를 접고 잘라 사용한 적도 있었다. 지은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꽤나 메모주의자였다. 작은 휴대용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는데, 술자리의 취중진담들을 채집하는 용도였다. 지금은 스마트폰의 에버노트에 주로 메모를 한다. 에버노트의 마지막 제목 없는 노트에는 ‘방 밖으로 버스가 지나간다. 그 거대한 인기척’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한번 읽은 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가슴 아린 일로부터 만들어낸 경이로운 이야기, 저열한 현실에서 잉태된 아름다운 이야기 “아침볕이 흐릿하게 사라질 때 해변을 걸으며 상상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휘트먼의 시구 같은 이야기. 그게 삶일 것이다. 나는 준비되어 있다. 삶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그만큼은 삶을 살아볼 것이다. 그러나 삶에 시달리면서도 가볍게 날고 싶고 삶에 시달리면서도 할 일은 하고 싶다. 나는 최고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전달하고 싶다. 그래서 잘 알아들으려 하고, 기억하려 하고, 이해가 될 때까지 메모를 한다.“ (pp.67~68)


  나는 나만의 노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노트를 차곡차곡 채우는 즐거움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때로는 너무 많은 것들로 노트를 채우다가 그 메모의 원천이 나인지 나 아닌 다른 누군인지 헷갈려 하기도 했다. (신경숙의 표절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 원천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아예 그 메모 노트를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실종에 진절머리가 날 즈음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 


  “... 사실 세상은 망각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있다. 구태여 기록할 필요도 적어놓을 이유도 없는 일로 가득하다. 우리 삶은 시간을 쓰고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망각에 딱 맞는 세상에서 굳이 왜 무언가를 메모했을까?...” (p.41)


  무수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 세계가 도래한 이후 메모의 역할은 굉장히 쪼그라들어 버렸다. 아주 작은 단서만 떠올릴 수 있다면 나의 사적인 메모장을 뒤적일 필요 없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나에 대한 정보도 나를 드러내 놓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검색하여 찾아낼 수 있다. (방금 내 블로그에서 ‘메모’라는 단어로 검색을 한 결과 72개의 글을 찾아낼 수 있었다.) 


  “4월 17일 국제 박쥐 존중의 날... 5월 4일 국제 닭 존중의 날... 8월 17일 검은 고양이 존중의 날... 8월 20일 세계 모기의 날... 10월 20일 국제 나무늘보의 날... 11월 7일 곰 안아주는 날...” (pp.80~81)


  사실 나는 여전히 (종이에 펜으로 적는다는 전통의 방식에 연연하지 구애받지 않으면서) 메모를 멈추지 않고 있다. 위에 옮겨 놓은 귀여운 내용들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든 남겨 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생명다양성재단에서 만든 달력을 보고, 지은이는 ‘이 달력은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준다’고 했는데, 나 또한 지은이가 옮겨 놓은 것을 다시 옮겨 적으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지은이가 옮겨 놓은 내용에는 훨씬 많은 동물의 날이 등장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쳐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어떤 곳이 밝고 찬란하다면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빛을 따라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p.164)


  그러고보니 아뿔싸, 지금이야말로 메모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과거의 방식과는 다른 보다 현재적인 방식을 택하게 됨에 따라 메모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보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별도의 인덱스 작업이 필요하지도 않다. 시집이 다시 유행한다는 이야기도, 각종 글쓰기 클래스의 번성도 메모 전성시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나저나 내 블로그에서 ‘메모’로 검색한 글이나 얼른 읽어봐야겠다.



정혜윤 / 아무튼, 메모 / 위고 / 165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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