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부재한 텅 빈 공간...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는 ’모르겠다‘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한다. 단편집에 실린 인물들의 어떤 행위는 이 ’모르겠다‘가 체화된 채로 이루어지는 것 같고, 또 다른 행위는 이 ’모르겠다‘를 구체화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나아갈 방향을 잃은 자의 헛된 궤적 위에가 아니라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지가 부재함으로써 생긴 텅 빈 공간에 작가의 소설이 있다. 그 안에 잘 모르겠는 인물들도 있다.
「모르는 영역」
“... 그는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부터 나뭇가지가 느꼈을 흥분과 불길한 예감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새여, 너의 작은 고리 같은 두 발이 나를 움켜잡는 착지로 이만큼 흔들렸으니 네가 나를 놓고 떠나는 나는 또 그만큼 흔들려야 하리...” (pp.28~29)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딸아이 다영과 아버지 명덕의 짧은 만남, 그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어떤 영역을 들여다본다.
「손톱」
해설에 따르자면 누군가는 《레몬》 출간 당시 작가를 ’슬픔의 마에스트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손톱‘을 읽다보면 ’슬픔의 마에스트로‘라는 부름에 과연,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이 터울이 있는 언니와 소희만을 남겨두고 그 언니의 대출금과 집 보증금을 들고 나가버린 엄마, 세월이 흘러 소희가 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소희를 두고 소희의 이름으로 대출받은 돈을 가지고 나가버린 언니라니... 일을 하고 빌린 돈을 갚고 그 빌린 돈의 이자를 갚고, 일을 하느라 손톱이 다치고 그 손톱의 치료를 위해 돈을 쓰고, 그렇게 빌린 돈을 갚는 미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고...
「희박한 마음」
“계량기 소리 때문만은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데런은 잠들지 못하고 몇 시간씩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심신이 나른해지고 불면의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면서 투명한 비눗방울 같은 잠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 들면 이제 곧 맥을 놓고 눈먼 누에처럼 잠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미간 안쪽 깊은 곳에서 기괴한 눈이 반짝 떠지고 흉부가 고장난 승강기처럼 난폭하게 덜컹거리면서 잠의 비눗방울은 감쪽같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데런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마치 드릴로 단단한 강화유리를 뚫기라도 하듯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파괴적인 중노동처럼 생각되었고 차라리 잠을 자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앉았다.” (p.87) 불면에 대한 위와 같은 기술을 읽어드리자 잠 못 이루던 어떤 순간으로 급하게 빨려들어갔다. 실상 소설은 어떤 소리와 꿈에 대한 것인데, 데런과 그 동거인이었던 디엔의 시간은 그 안에서 모호하게 얽혀 있다.
「너머」
“... 오래전, 그게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간에 어머니는 삶을 놓아버렸고 그 자리에 가끔 웅웅대며 울고 가래 때문에 그르렁거리는, 한쪽은 나무토막처럼 굳고 다른 쪽은 가시처럼 마른, 움직이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경련만 일으킬 따름인 기저귀를 찬 작고 마른 생물체만 남았다. 어쩌면 그 생물체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일 수도 있었다. 활기도 자유도 없이 바짝 쪼그라든, 기한이 없는, 무기의 죽음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N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도록 확연하게 떠올랐다. N은 툭 뱉어내듯, 순식간이야, 하고 말했다...” (p.149) 기간제 교사로 N이 짧은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과 N의 어머니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누워 있는 요양 병운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의지 있는 자들의 악다구니와 그런 의지 있는 자들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 자들의 포기된 악다구니가 교차하는 것만 같다.
「친구」
누가 봐도 신산하기 그지 없는 해옥의 삶인데, 그 안의 해옥만은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으로 제 삶을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리라고 여겨지는 그런 삶이다. 그 삶에는 끊임없는 이물질이 끼어들고 그로 인한 균열은 매순간 거듭된다.
「송추의 가을」
아버지의 유골을 꺼내 화장을 하고 이장을 하러 모인 네 남매의 서로 다른 입장들이 막내인 나의 시선 안에서 거듭되고, 급기야 폭발해버리는 나는 그들을 두고 차에서 내린다.
「재」
“... 아무 기댈 곳도 없고 아무 쥘 것도 남지 않은 이제 와서야 그는 비로소 겉돌던 세상의 틀 속에 겨우 들어앉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회오리치던 그의 가르마를 누군가 단정히 잡아준 것만 같았다.” (p.221) 카프카의 <변신>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에 등장하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향하는 모호한 시선들의 겹침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나또한 애매하기만 한 현실의 어느 한 귀퉁이를 향해 자꾸만 시선을 던지는데, 그것들이 어느 한 순간 ’단정히‘ 정리되어 버린다. 잘 정리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전갱이의 맛」
“말이란 게...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p.241) 우연하게도 어제 까페 여름의 형을 만나 말에 대한 대화를 나눴더랬다. 나는 적당히 대화를 나눌만한 이가 부재하는 현재의 내 삶의 패턴과 그로 인해 대화와 만남 자체에 겁을 먹게 되어버린 나를 토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토로인지도 모르겠다, 혼잣말을 하다가 웃음이 터져 사거리에서 늦은 좌회전 출발을 하고 말았다.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 중 <전갱이의 맛>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소설은 책의 가장 나중에 실려 있다.
권여선 / 아직 멀었다는 말 / 문학동네 / 281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