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야기들에 장막을 드리우는 은폐의 기술이랄까...
「철수와 영희와 바다」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이 서로를 이어준 연인인 강철수와 신영희가 여행을 떠났다. 둘은 튜브를 타고 해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가고, 그곳에서 바다에 떠 있는 채로 다툰다. 두 사람의 무사귀환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다툼이 있도록 만든 사건의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냐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은 참 흔하다. 그러니까 흔했었다.
「2054년, 교통사고」
꽤나 재미있는 설정이다. 자율주행이 완전히 보편화된 사회에서의 교통사고는 인간을 원인으로 해서는 일어나기 힘들어진다. 사고의 가능성을 영으로 환원시키는 테크닉 고도화 사회에서는 결국 ‘자동차가 자살한 것’ 같다는 가설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마네킹」
일종의 피그말리온 이야기이다. 사실은 동명의 영화도 있었다. 리얼 돌이 사회 문제화 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마네킹과 마네킹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다고 믿는 사람 사이에 벌어질 법한 이야기에 접근하고 있다.
「미루의 초상화」
작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데 능숙하다. 그의 이러한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단편이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인, 그 노인에게 술을 사주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자신이 만났던 미루라는 여자, 그리고 젊은 시절 그 여자와 보냈던 시간과 바오밥 나무를 향하였던 여행, 그리고 여행지에 떨구고 온 여자와 다시 노인을 찾아온 여자, 그리고 이제 노인이 그리는 모든 초상화에는 그 여자 미루의 얼굴이 스며들어 있다.
「유령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크루지 영감을 재해석하며 영화 식스 센스와 같은 반전을 노리고 있다.
「마계 터널」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겪었다고 주장하는 지하철 괴담을 하나씩 풀어나가던 자리에서 회사의 대표인 한수는 자신이 지하철 레일 위에서 마주쳤던 노인과 괴생물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페이지의 중앙에 위치한 검은 동공을 조금씩 키워가는 페이지의 프린트 방식이 재미있다.
「현장부재증명」
곤이 중고로 팔아넘긴 세탁기를 건네 받은 여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곤은 형사들에 의해 자신이 쓴 소설과 함께 취조를 받게 되고, 그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그 사이 곤은 자신과 건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되고, 범행을 자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곧이어 진범이 잡히게 되고...
「위험한 비유」
“당신은 아직 나의 추락에 대해 쓰지 않았다. 내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질 때 어떤 소리가 났는지, 사지가 어떤 각도로 꺾였는지, 뒤통수에서 흘러나온 피가 어떤 모양으로 번졌는지, 나의 마지막 눈빛은 어땠는지······ 그래서 나는 여전히 7층 허공에 드러누워 있다. 줄을 타고 내려온 한 마리 유령거미처럼 가만히 매달려 있다.” (p.249) 당신과 유령거미를 비롯해 프시케, 에로스, 황교수, 소년, 할머니, 남자, 소녀로 인물들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소설 쓰는 인공지능 NARR-7까지... 나는 ‘당신은 내가 쓴 기형의 문장이며, 아직 못다 쓴 미지의 문장이며, 그 사이를 지나는 모래바람이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최제훈 / 위험한 비유 / 문학과지성사 / 276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