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혼자 페달을 구르고 싶은 마음의 마지막 뒤돌아 봄...
’진주‘라는 책 제목과 마주하였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주인공의 이름이 ’진주‘인가 하는 거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조개의 체내에 생긴 분비물의 결합체를 말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실상은 경상남도에 위치한 지방 도시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다. 제목만으로는 속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또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회고적인 그러면서 에세이적인 요소가 강하다.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지 않는 것.” (p.100)
책의 제목이 진주인 것은 바로 그 진주에 진주교도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나의 아버지가 있었다. 책은 나에 대한 회고이며 동시에 당신이라고 지칭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 서 있던 이였고, 집이 있어도 집에 맘 편히 기거할 수 없는 이였다. 잠시 집에 들러 이미 커버린 나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이였지만 또다시 집을 떠나야 하는 이였다.
돌아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뒤통수로 받아들이며 자전거를 배웠던 나는 한 권짜리 책으로 자신의 삶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아버지를 소환한다. 아버지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소환한다. 진주교도소에 들르기 위해 생애 최초로 비행기에 오르는 나를,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그곳을 향하는 여정의 과정을 통해 수면 위로 걷어 올린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쓰지 않을 수 없는 내가 거기에 있다.
“나는 자주 열쇠를 잃어버리고 새 열쇠를 복사한다. 나는 자주 볼펜을 잃어버리고 새 볼펜을 구입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오늘 하루가 어제 하루와 다름없다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복사본에 지나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의 나는 어느새 과거의 나로부터 먼 곳에 와 있다. 나는 아버지가 있어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그 사실은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이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적은 보수를 받는 회사의 막내 사원이 되었는데 그 사실은 내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이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열 살 무렵의 내가 민주주의의 사명과 신념을 더 잘 이해했다고 느낀다.” (pp.182~183)
작가가 기록하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마도 미루고자 하였다면 더 미룰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울타리 밖의 우리들은 영영 들여다볼 수 없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조금 길게 작성된 작가의 말에는 그 이야기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당도하게 된 연유가 자세히 밝혀지고 있다. 차학경의 《딕테》나 강사로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던 소설가 한강이 거기에 등장한다.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강도로 누군가 듣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진심으로 듣는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강도로 상대가 말하고 있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화자는 청자를 향해 말함으로써, 청자를 화자를 향해 귀를 기울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나타나게 한다. 장場은 그렇게 생겨나며 그때 표현은 표현으로서 성립한다.” (pp.287~288)
《진주》는 소설로 읽기에 좋은 소설은 아니다. 작가가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지극히 사적인 접점으로만 접착되어 있고, 때때로 문장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유롭다.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옛 이미지에도 공공의 것과 나만의 것이 겹쳐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심경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 이제 됐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자전거 뒤를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이제는 혼자 페달을 구르고 싶었던 거다.
진주 / 장혜령 / 문학동네 / 297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