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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외 《2020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여성 서사의 지독한 강세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가는...

by 우주에부는바람

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그녀의 엄마는 매일 그녀의 방을 청소해주었고, 계절마다 제철 채소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오빠만 학원에 보내주었고, 그녀의 재수를 반대했으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다시 월요일, 그녀는 늘 그렇듯 둘째 아이를 안고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다 허물어져버렸을 붉은 지붕의 집을 보고 싶지 않아 다른 길로 갈 생각이었지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상 다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창문이나 외벽 없이 뼈대만 드러나 있는 집을. 집의 곳곳은 철근이 드러나 있었고, 절반 이상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낡고 더러운 천이 매달려 있었으며, 모든 것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황폐해진 집은 5월의 빛 속에서 군더더기가 생략된 무대처럼 아름다웠다.” (pp.28~29) 이미 집에 있는,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심지어 앞으로도 그러할 그녀와 그녀가 눈에 두었던 어떤 집이 허물어져버린 광경이 오버랩 된다. 그녀를 일깨운 것이 그 집인지 아니면 그녀의 골격에 대해 이야기한 어떤 남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백수린 「시차」

“그녀가 말했다. 체리 블로섬. 시간이 흐르면 꽃이 피고 진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마른 가지에서 또다시 움이 튼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단지 그런 것뿐인지도 몰랐다. 시간의 흐름이 허락하는 선한 치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는 유리 너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 나무에서는 하얀 꽃잎이 눈꽃처럼 떨어져. 언젠가 너도 볼 수 있기를” (p.48) 이모를 대신해 독일에서 생애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그러니까 한 번은 태어나느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자신의 생모가 있는 그곳을 방문한, 빈센트와 보낸 일련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모가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해야 한다.


강화길 「음복飮福」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 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pp.90~91) 남편을 따라 시댁에서 치르는 제사가 있는 날, 그곳에서 나는 남편의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을 하는 인물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기준영 「완전한 하루」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떤 날들이 떠올라요. 하루는 잘 다니던 길에서 사슴을 칠 뻔했어요. 그 사람이 운전을 했는데, 우리 둘 다 너무나 놀랐네요. 늘 조심해 다녔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는데 사슴이, 어린 사슴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차를 세워놓고 진정을 하려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너무 많이 울더라고요. 그날 밤에 우리 둘 다 왠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p.115) 파혼을 맞이한 주현과 오래 전 형수였던 인물과 사랑의 도피를 한 적이 있는 민규, 홍보 일을 하는 주현과 이십대에 만화책을 한 권 낸 적이 있는 민규... 삶의 어느 시절 맞닥뜨렸던 갑작스러운 순간을 간직하고 살아가다, 그렇게 간직하였던 순간을 꺼내어 이야기하게 되기도 하는 어떤 만남의 이야기이다.


김사과 「예술가의 그의 보헤미안 친구」

“... 그녀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하지만 절정에 이른 이야기를 한비는 무자비하게 중단하며, 앗 약속이 있는 것을 깜빡했네, 역시 절정에 이른 이수영을 다 녹아버린 빙수와 함께 버려둔 채 떠나버렸다. 버림받은 이수영은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구름에 둥둥 뜬 심정으로 백화점을 빠져나와 무채색의 압구정 거리를 헤매 다녔다... 마침내 그녀가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몸을 숙이고 서둘러 뛰었다. 때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고, 이수영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밖은 순식간에 흥건히 젖은 물의 세계가 되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버스는 잠수함처럼 전진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이수영은 반쯤 넋을 잃은 채였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도대체 오늘 그녀와의 만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p.128) 이수영과 한비가 운명적으로 만나던 날을 이수영은 ’계시의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십수 년 간의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첫 번째 만남의 날 만큼이나 흥미롭다. 어쨌든 이수영은 에술가가 되었고, 그녀는 한나의 결혼식 날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되는데... 예술가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소소한 리포트 같은 것일까.


김애란 「숲속 작은 집」

한국에서 비행기로 일곱 시간 거리에 있는 산악 도시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곳에 집을 빌려 머물렀던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나와 지호가 기거하였던 ’숲속 잡은 집‘, 그곳에서 가사를 도왔던 한 여인과 그녀의 딸에게 품었던 나의 과민한 생각이 있었다.


손보미 「사랑의 꿈」

“어떤 사실은 그저 있는 그대로 쓰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된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써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그건 언제까지나 당신 마음속에만 있어야 해요.” (p.201) 지방의 유복한 집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딸을 낳았고 이혼을 하고 그 남자가 죽었다. 그녀는 방학이면 그 남자의 엄마가 있는 집에 달을 보내고, 그 엄마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다. “... 그녀는 아주 작은 선택들, 아주 사소한 충동의 결과들이 누군가를 들끓게 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결정들이 삶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pp.236~237)


우다영 「창모」

“남편은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곳이 내가 있을 자리라는 듯이. 나는 고개를 돌려 남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남편의 시선은 창모를 닮은 남자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남편은 마치 멈춘 시간 속에서 딱딱한 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저 사람이 보여? 나는 묻고 싶었다. 한낮의 피크닉을 즐기던 강가의 수많은 사람들도 아무런 미동 없이 남자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그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저 이상하고 위험한 것을 어서 치워버리길, 그것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p.266) 나와 창모의 오랜 인연에는 어떤 곡절이 숨겨져 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해 소설은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의아함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당시 나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생의 뺨을 때리고 말도 없이 사라진 동료 선생 대신 그 일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다른 선생님이 올 때까지는 수업을 하겠다고 말하자 원장은 갑자기 가발을 벗어 던지며 옆, 옆, 옆 교실에까지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씨발 년아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푼 모양이었다. 나는 좀 놀라긴 했지만 요즘 같은 때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담담히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새벽 원장은 내게 미안하다며 다른 선생을 구할 테니 2주 정도만 더 수업을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틀 뒤부터 살마들이 면접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새 선생님이 결정되었고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마디 인사만 나누고는 짐을 뺐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서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pp.272~273) 문체가 무척 마음에 든다.


장강명 「대기 발령」

대기 발령을 받은 회사의 직원들이 보내는 시간들, 그들이 처하게 되는 공간들이 나름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최은미 「보내는 이」

진아 씨와 나의 아이는 이름에 똑같이 윤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윤이들은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고, 나는 때때로 진아 씨의 집에서 윤이들이 놀고 있는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나는 나의 달 하윤이가 진아 씨의 딸 서윤이가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진아 씨에 대한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도통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편혜영 「리코더」

무영은 수오의 집에 살고 있다. 실은 무영의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수오의 증발 이후, 그러니까 마치 마술사 후디니의 주특기를 닮은 수오의 사라짐 이후 경찰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눈길에 곤혹스럽다.



백수린 외 / 2020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현대문학 / 40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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