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할 수 없는 우리 소설의 어떤 경향이 분포되어 있는...
윤성희 「어느 밤」
“남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는 신경써서 저녁 밥상을 차렸다. 남편은 돼지 등뼈를 넣고 끓인 비지찌개를 좋아했다. 동태찌개도 좋아했는데 이리와 애가 들어간 걸 좋아해서 재료를 사러 일부러 수산시장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그런 음식을 하는 날이면 남편은 식탁에 앉아서 오늘이 내 생일이네, 하고 말하곤 했다. 남편의 환갑 생일에는 딸이 들어왔다. 박사과정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학위를 마치면 셋이 미국 여행을 하자고 딸이 말했다. 내 환갑 때는 오지 않았다. 대신 선물이라며 핸드백을 보냈다. 남편의 칠순에는 돈을 부쳤다. 좋은 곳에 취직을 했다고, 그러니 걱정말고 맛있는 거 사 드시라고. 내년 내 칠순에는 올까? 딸이 오면 제주도라도 가야겠다. 생각해보니 가족 여행이라는 걸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p.21) 치매보다도 요실금을 더 무서워하는 할머니가 된 나는 ‘어느 밤’에 킥보드를 훔쳤다. 훔쳤다기보다는 킥보드가 있는 장소를 바꿔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마련한 킥보드를 타다가 넘어지고 그런 나는 한 청년의 도움을 받는다. 남편과 나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간 내가 남편으로 인해 겪었을 마음 고생을 넘겨 짚을 수는 있다. 그렇게 가늠된 한 여성의 과거와 현재가 킥보드 위에서 갸우뚱 한다.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마리아는 일흔두 살에 죽었다. 소피아라는 손녀가 있었고, 병원에는 좋지 않은 지경의 아들도 있다. 하지만 아들도 손녀도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은 아니다. 마리아는 성당에 다녔고 신부에게 장례를 맡겼고 이런저런 성도들이 그녀의 죽음에 한 마디씩 보태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참 고귀하지를 않다’ 베르타는 스스들을 향하여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이라고 되뇌인다. 어쩌면 그 고귀하지 않은 우리들의 반대편에 ‘마리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
“... 둥근달을 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p.96) 정신을 놓아버린 장인을 데리고 그런 장인에게 점점 더 ‘사납게’ 굴고 있는 아내와 나는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곳으로 옥황상제를 믿는 종교단체의 전도자들이 찾아오고, 살인 사건으로 위협을 가하는 보안업체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정된 시간이라는 불변의 원리 아래에서만 가능한 우리의 삶이 한적한 마을에서 계속되고 있다.
조해진 「환한 나무 꼭대기」
“... 눈앞의 시체는 강직, 시반(屍斑), 부패와 냄새, 흙과 먼지와 바람 같은 단어들과는 무관한, 그저 한바탕 무례하고 시끄럽게 기거하던 손님이 빠져나간 적요한 빈집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손님의 이름은, 통증이었다.” (p.115) 그리 친하지 않은 동창이었던 혜원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죽음 이후의 혜원을 발견한 것은 그녀이다. 그녀는 아는 이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맡기고 싶어 한 혜원이 호스피스 병동에 머무는 동안 곁을 지켰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혜원이 죽고 혜원이 유산으로 남긴, 아들이 찾아오면 넘겨줘야 하는 아파트에 머물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탈영한 병사와 마주치게 되고, 그 병사에게 그녀는 혜원의 아들을 연상한다.
황정은 「파묘」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p.174) 엄마를 모시고 파묘의 과정을 담담히 치러내는 딸이 있고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지내고 있는 아들이 있다. 사실 이제 남은 이들은 줄어들고 죽은 이들은 늘어나고 있다. 아니 남은 이들은 언제나 죽은 이들보다 수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다. 묘는 남은 이들에 의해 정리가 되거나 최소한 저절로 사라지게 될 터이다.
최은미 「운내」
“... 트럭에서 내릴 때, 발이 닿지 않아 머뭇머뭇하다 점프를 했다. 막 피어나고 있는 불칸 목련을 보았고, 유리문까지 걸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맡았다. 종이를 태운 냄새. 화장품 뚜껑 냄새. 바나나가 익어버린 냄새. 초냄새. 농냄새. 볼펜 똥냄새. 맵고 화하며 쌉쌀하고 단 냄새에 뭐 하나가 더 얹어진, 그런 냄새였다. 승미와 나는 그 냄새를 운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툭하면 코를 싸쥐고 말했다. 아, 운내 나.” (p.190) 대체 의학이 횡행하는 운내라는 곳으로 내려가게 된 나는 그곳에서 승미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친척 관계로 얽혀 있는 아직 어린 두 아이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곳의 어른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술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탐구의 결과로 인해 둘 중 하나는 거기에서 아이로 남고 한 아이는 그곳을 벗어나 어른이 되었다.
김금희 「마지막 이기성」
“...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연락이 완전히 끊긴 다음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을 유키코의 일상이 무겁게 마음을 눌렀다. 어쩌면 그와 유키코가 재회하는 것은 그렇게 그들이 일상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이별하고 나서도 꽤 이기적으로 살아냈다는 현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지 않을까.” (p.258)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가 겪은 차별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유키코라는 재일교포 3세 학생이 있고, 그들이 차별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이 있고, 그 시위가 제대로 먹히지 않아서 유키코가 만든 배추밭이 있고, 거기에 묻어 놓은 타임 캡슐이 있다. 이제 시간이 흘러 배추밭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출장을 핑계 삼아 일본에 도착하지만 결국 유키코를 만나는 것은 그만둔다. 대신 그는 타임 캡슐을 파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윤성희, 권여선, 편혜영, 조해진, 황정은, 최은미, 김금희 /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282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