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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보기 드물게 구체적인 일터의 구체에 어지간히 접근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잘 살겠습니다」

“상자를 열었다. 분홍색 하트가 그려진 백설기 한조각과 저마다 색이 다른 경단 네개, 쑥색 꿀떡 두개가 들어 있었다. 허기가 느껴졌고, 이내 침이 고였다. 랩 포장을 벗겨내고 샛노란 고물이 포슬포슬하게 묻혀진 경단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방금 쪄낸 듯, 아직 따뜻했다. 오늘 새벽에 찾았나보네. 나는 달고 쫄깃한 경단을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p.33) 소설 내내 계속되던 주인공의 빛나 언니를 향한 경원의 태도가 마지막 순간 뒤집혀 다행이다. 우리 주변의 어딘가에 혹은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발굴하는 데 성공하여 완성에 이르는 작고 소소한 이야기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

표제작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인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하고 있는 일터의 이모저모를 구체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과 어느 정도 차별화되는 포인트이다. 허울 좋은 IT 업체들, 그러니까 겉은 번드르르 하지만 그 속내는 굴뚝 산업의 메커니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곳에서 일하는 인물들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내를 거듭하고 있는데, 우리 모두는 그 사실에 눈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아무래도, 자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꼭 잘 필요가 있나, 그런 거죠... 자면 뭐 해요. 어차피 자고 나면 다 똑같잖아요. 지훈씨도 그걸 모르지 않잖아요... 그 마음이 저도 반 정도는 있었던 거니까. 그리고 그게 우리 모두에게 동시에 있는 상태로 잠시 스쳤던 순간이 있었던 거니까.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요...” (pp.94~95) 전화로 이루어지는 이 대화를 읽으면서, 그러니까 후쿠오카까지 찾아갔지만 하룻밤 함께 자는 것에 실패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향해 조목조목 제 할 말을 하는 여자 사이의 대화를 읽으면서 이상한 통쾌함을 느꼈다.


「다소 낮음」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래 전 사다 준 냉장고,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이 4등급으로 다소 낮은 그 구식 냉장고를 소재로 만든 ‘냉장고송’을 찍어서 유트브에 올린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상황을 호재로 사용할 것을 권하지만 노래를 만든 장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그러니까 소설은 구식 냉장고만큼이나 효율이 떨어지는 한 젊은 음악가의 이야기이다.


「도움의 손길」

자신의 집의 청소를 누군가에 맡기는 한 가정 주부가 겪게 되는, 짓궂은 장난과 같은,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종의 악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가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집 『악몽』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이야기이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짧은 소설. ‘졸업 후 각기 다른 세개의 회사에서 인턴과 계약직으로 육개월, 육개월, 일년’을 일했던 주인공이 드디어 정규직 합격이라는 통보를 받고 첫 출근을 하는 날 겪게 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놓았다.


「새벽의 방문자들」

포털 사이트의 관계사에서 댓글을 필터링하는 업무를 하는 여자가 매일 만나게 되는 ‘더티’한 성인 게시물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와 겪어야 하는 의문의 남자들의 초인종 세례, 이 두 상황 사이의 멀고도 가까운 거리가 자꾸 그녀를 이사하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탐페레 공항」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가는 가장 싼 항공편을 이용하다보니 거쳐야 했던 핀란드의 작은 도시인 탐페레에 위치한 공항, 그곳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만났던 시력이 시원찮았던 노인, 삼개월의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와 마주한 핀란드 노인의 편지, 그 후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살아내던 얼마간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동안 잊고 있던 핀란드 노인의 편지를 나중에 발견하고, 나는 노인의 집으로 전화를 하고, 이제야 미루고 있던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장류진 / 일의 기쁨과 슬픔 / 창비 / 235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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