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인 문장으로도, 속수무책 진행되는 중층의 미스터리들...
한동안은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빠져 살게 될 것 같다.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있고 그 작품들이 대부분 긴 분량이어서 금세 멈추게 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문장은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제공하고, 작가의 이야기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을 때처럼 흥미진진하다. 나는 대체로 정적인 문장을 좋아하지만 이후의 전개가 활기차게 미스터리하게 속수무책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
“... 어떤 이들은 어디가 아픈지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음을 멈출 수 없다.” (1권, p.14)
소설은 아이리스라는 노부인의 ‘울부짖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혹은 팔십 세가 넘어 아직 살아 있는 아이리스와 함께 울부짖는 이십 대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로라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로라가 생명을 멈춘 시점에 비로소 시작되는 아이리스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로라와 아이리스가 있게 한 캐나다의 한 지역의 이야기이고, 세계대전을 비롯한 20세기 초반을 살아낸 사람들 전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거의 어스름 녘이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는다. 정원을 휩쓸고 가는 급류의 소리는 긴 호흡같이 들린다. 푸른 꽃들은 공중으로 섞여 들어가고, 붉은 꽃은 검은색으로 변해 버리고, 하얀 꽃들은 형광색으로 빛난다. 튤립 꽃잎은 벌거벗은 암술만 남겨 놓고 져 버렸다. 까맣고 주둥이같이 생겼으며 성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암술. 작약은 거의 시들어 지저분하고 젖은 티슈처럼 히밍 없지만, 백합과 풀협죽도는 이제 막 피어났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렌지 나무는 잔디 위에 하얀 장식 종이 같은 꽃잎들을 떨어뜨린다.” (1권, p.119)
“날이 어두워지고, 나무들은 침울해지고, 해는 동지 지점을 향하여 내리막길을 굴러간다. 그러나 아직 겨울은 아니다. 눈도 오지 않고, 진눈깨비도 내리지 않고, 아우성치는 바람도 불지 않는다. 이렇게 겨울이 늑장을 부리는 것이 왠지 심상치 않다. 회갈색 고요함이 만연하다.” (2권, p.39)
작가가 여전히 시를 발표하는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작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으며 재차 확인하게 된다. 치명적인 이야기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혹은 그 이야기들을 정리해가는 중에 도드라지는 몇몇 문장들은 일종의 정서적 환기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이야기들로 넘어가도록, 혹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가기 전에 지나온 페이지들을 더듬는데 시간을 할애하도록 만들어준다.
“진실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쓰는 것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훗날의 나 자신조차도.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글쓰기가 오른손의 검지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긴 두루마리처럼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왼손이 그것을 지우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2권, p.11)
특히나 《눈먼 암살자》처럼 중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설을 읽는 데에는 숨을 가다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아이리스의 회고록을 카펫으로 삼는다면, 그 위에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이 카펫 전체에 깔려 있는 문양이 될 것이고, 소설 《눈먼 암살자》 안에서 이야기되는 눈먼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비롯한 외계 행성의 이야기는 그 문양 안의 디테일한 무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할들은 서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로라가 이 대목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오후의 햇빛이 내 침실 창을 통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로라는 바닥에 엎드려서 양말 신은 발로 공중을 차 대면서 우리가 협동하여 갈겨 쓴 것을 열심히 자신의 공책에 옮겨 쓰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연필을 깎아 낸 냄새가 풍겼다.” (2권, p.362)
그리고 짧게 잡아도 육십여 년을 넘나드는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은 미스터리의 정점에 있는 로라 체이스의 독보적인 캐릭터와 그 행성을 중심으로 고리를 만들어버리는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폰의 쉽게 드러내지 않는 존재감이다. ‘좋은 판단은 경험’에서 비롯되고 그 ‘경험은 나쁜 판단에서’ 비롯된다는 소설 속 인용구를 따르자면 둘은 그렇게 우로보로스 식으로 얽혀 있는 자매였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 차은정 역 / 눈먼 암살자 (The Blind Assassin) / 민음사 / (전2권 1권 483쪽, 2권 423쪽) / 2010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