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 《도둑 신부》

모두의 안타고니스트이자 팜므 파탈이었던 한 여인을 통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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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4년 6개월 전에 죽은 지니아가 세 명의 친구 토니, 캐리스, 로즈의 눈 앞에 다시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토니, 캐리스, 로즈는 지니아라는 모두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었던 막강한 안타고니스트를 통해 친구가 되었고, 지나아의 죽음 이후 톡시크라는 식당에 모여 점심을 함께 하는 행사를 치러왔다. 그런데 바로 그 톡시크에 죽은 줄 알았던 지니아가 등장한 것이다. 세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뜬다.


”... 그녀로서는 대화 내용보다 두 친구의 존재 자체가 더 중요하다. 말은 창문에 다는 커튼과 비슷할 때가 많다. 거추장스럽지만 옆집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려면 참아야 하는 칸막이다...“ (1권, p.118)


이제 소설은 토니, 캐리스, 로즈라는 인물의 과거를 향해 진행된다. 각각의 인물이 어떻게 지니아와 마주치고 그녀로 인하여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토니의 남자 웨스트, 캐리스의 남자였던 빌리, 로즈의 남자였던 미치가 등장한다. 소설은 과거로의 행진을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른손 사용을 강요당하던 어린 시절의 토니, 부모를 잃고 이모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던 캐리스의 어린 시절인 캐런, 지금은 큰 사업체의 대표이지만 하숙집 딸내미였던 어린 시절의 로즈에게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해 질 녘이다. 열린 창문 너머로 깎은 잔디 냄새가 흘러들고, 풍뎅이들이 방충망에 와서 부딪힌다. 캐런은 자전거의 반짝이는 바퀴살과 체인과 두 까만 바퀴를 보며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직감한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3주 뒤에 돌아가셨지만 마찬가지였다. 침대 시트를 반으로 접는 것처럼 가끔 시간이 접힐 때가 있는데, 미래 예측이란 침대 시트를 접어 아무 데나 핀을 꽂으면 구멍이 두 개 가지런하게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음악에서 두 가지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며 만들어지는 화음이나 호수에서 밀려나가는 물살처럼 신기할 게 아무것도 없다. 추억도 똑같은 오버랩이고, 똑같은 주름이다. 다만 방향만 거꾸로다.“ (1권, 1p.454)


현재와 과거, 과거와 더 과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 여성 캐릭터들은 각각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각각의 삶의 굴곡을 오르고 굴러 떨어지느라 여념이 없다.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세 명의 여성 모두의 과거와 과거 이전을 이토록 촘촘하게 훑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들을 작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지우고 또 그렸을 지를 짐작케 한다.


”...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여자를 훔쳐보는 남자가 들어 있다. 여자들은 자기가 자기를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다. 이 세상의 지니아들은 이런 현상을 연구해 자기들 입맛에 맞게 비틀었다. 남자들의 환상에 자기들을 맞추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틀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꿈속으로 들어갔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의 꿈속으로도. 여자들을 보며 남자들만 환상을 품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환상을 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격이 다른 환상이지만.“ (2권, p.187)


그리고 이들 세 명의 인물의 반대편에 지니아가 도사리고 있다. 지니아가 없는 동안에도 지니아는 있었던 것 같고, 지니아가 이들의 곁에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지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도 지니아는 여전했다. 이들의 남자 친구 혹은 남편에게는 강력한 팜므 파탈이었고, 이들 세 친구에는 거짓말을 일삼으면서도 뻔뻔할 정도로 솔직하였다고 할 수 있는 지니아는 그렇게 안타고니스트이면서도 주동적으로 소설을 이끌고 있다.


“모든 결말은 임의적이다. 끝이라고 쓰는 지점에서 끝난다. 마침표, 구두점, 정지된 지점. 종이에 대고 핀을 콕 찔러 그 구멍에 눈을 대고 보면 반대편이 보인다. 무언가의시작이 보인다. 토니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시간은 나무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물이나 바람처럼 유동적인 것이다. 10년, 100년, 이렇게 일정한 길이로 깔끔하게 잘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목적을 위해 깔끔하게 자르는 것이 가능한 척해야 한다. 모든 역사의 끝은 우리가 다 같이 공모한 거짓말이다.” (2권, p.310)


주인공과 그 적대자 모두를 철저하게 여성 인물로 채우고 있는 소설은 여성 심리에 대한 관찰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순진한 아가씨들을 꾀어 먹어 치우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도둑신랑’이라는 이야기를 뒤집은 ‘도둑신부’를 제목으로 차용한 것도 일종의 함의일 것이다. 어떤 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토록 지독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작가의 소설이 일반적인 장편 소설의 두 배 내지 세 배의 분량이 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를 감내하고 볼 용의가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 이은선 역 / 도둑 신부 (The Robber Bride) / 민음사 / 전2권 (1권 507쪽, 2권 327쪽) / 2011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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