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를 향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SF적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너무나도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후배의 메시지를 받고,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책 무더기에서 《킨》을 찾아냈다. 이전에 읽은 작가의 소설집에서는 느끼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화들짝, 하고 말았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런 소설에게 부여하기에 적당하다. 후배의 말마따나 한 번 잡으면 중간에 놓기가 힘든 소설임에 틀림없다.
“... 루퍼스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나를 불러가고, 내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나를 집으로 데려온다는 거네.” (p.89)
소설은 일종의 타임슬립 이야기이다. 20세기의 나는 어느 날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고 19세기의 어느 공간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19세기에 루퍼스가 있다. 루퍼스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아버지쯤이 되는 인물이다. 내가 19세기로 갈 때마다 루퍼스는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고 나는 루퍼스를 구한다. 흔하디 흔한 타임 슬립의 이야기 같지만 나는 흑인이고 루퍼스는 백인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루퍼스가 앨리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부끄러울 것은 없어도, 흑인 여자를 사랑한다면 부끄러울 수 있는 시대였다.” (p.236)
1976년의 나는 백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흑인이지만 1815년 루퍼스에게로 가는 순간 그저 흑인 노예 여성일 뿐이다. 루퍼스는 노예를 거느린 지주의 아들이고, 근처에는 자유민인 흑인의 딸인 앨리스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앨리스가 자신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타임 슬립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맞닿아 있음을 받아들인다.
“... 우리는 서로를 심하게 상처 입힐 수 있었고, 증오심에 북받쳐 순식간에 서로를 죽일 수 있었다. 루퍼스는 나에게 남동생 같았고, 앨리스는 여동생 같았다. 루퍼스가 앨리스를 상처 입히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내 가족이 존재하려면 계속 그래야 한다는 사실도······ (p.349)
심지어 나는 남편인 케빈과 함께 과거로 돌아갔다가 그만 혼자만 현재로 돌아오는 경험도 하게 된다. 현재의 시간으로는 며칠일 뿐이지만 그곳에서는 오 년의 시간이 흘러버린다. 그곳에서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비례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현재에서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루퍼스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앨리스는 억지로 루퍼스의 아이를 낳게 되고, 나는 나로 존재하게 되지만 그들 모두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 나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내 집, 내 시대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벽에 붙어 있었다. 마치 내 팔이 벽에서 돋아나는 것처럼, 혹은 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p.509)
현재의 흑인이 과거의 흑인으로 돌아가 1975년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노예 되기의 과정을 몸소 체험한다는 설정은 그로테스크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노예제 아래에서의 참상은 현재에 살고 있는 내가 직접 겪음으로써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라는 나의 말이 가리키는 시대를 향한 작가의 문제 의식이 SF적 상상력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옥타비아 버틀러 Octavia E. Butler / 이수현 역 / 킨 (Kindred) / 비채 / 519쪽 / 2016, 2018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