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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어떤 원형에서 추출된, 이 아니라 어떤 원형을 향한 출발로...

  “나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로 실재하는 아시아를 여행했다. 여행은 ‘나’라는 존재가 붙박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운동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여행은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어 분산시키는 하나의 작용이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설설 끓는 솥에서 분출하여 사라지는 안개처럼, 당신의 얼굴이 사라진 다음 그 주위를 맴도는 부사처럼. 아련한 그 모습, 여자이면서 짐승이기도 한 아시아의 ‘아시아’가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느꼈다...” (p.14)


  2016년 작가는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산문집을 낸 적이 있다. ‘않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인 ‘않아’에 입을 만들어주고 그것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전위적인 제목에 혹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명사에 ‘~하기’라는 어미를 붙여서 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제목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여자, 짐승, 아시아라는 각각이 연관성을 크게 가지지 않는 세 개의 명사가 동시에 그 ‘~하기’ 앞에 붙어 있다.


  “여자하기는 ‘여자이고자 함’이다. 타자와 감응하여 작고 낮은 것을 몸에 분포해야 한다. 여자이고자 함은 대립항인 남자라는 포지션이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기 이전에, 인간 각자가 스스로 여자라는 복수성, 내 안에서 흘러넘치는 여성적 실재를 향해 여행해가야 함을 이른다. 또한,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이나 나의 에너지로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과 접속 속에서 여자를 구현해가야 한다. 나는 날마다 다른 정체성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p.16)

  “여자하기는 일종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여자의 몸으로 겪는 복수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이다. 몸의 경험을 사유하기이다. 사유하기는 공동체하기이다. 여자하기의 여행은 그 나름의 궤적이 있다. 이 여행은 길 아닌 길로 가는, 다방면으로 준동하는 이분법의 고착을 넘어서는 가기이다...” (p.18)


  실제 산문집은 일종의 여행의 기록이다. 작가가 아시아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겪은, 어쩌면 외적으로 발생한 상황보다는 그 상황에 맞물려 떠오른 내적인 상황에 천착하여 쓴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작가가 다니고 있는 곳의 지명 등은 글의 내부에서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인 우리는 작가가 머물고 있거나 지나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그곳들이 아시아의 어디쯤이라는 사실만을 간신히 알 수 있다.

   “짐승하기는 퇴행이나 미성숙이 아니다. 일탈이나 (역)진화가 아니다. 내가 쥐를 썼다고 해서 내가 쥐로 퇴행하거나 쥐의 미성숙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 아닌 존재와의 모든 ‘하기’이다. 벌거벗은 생명하기이다. 스스로 그러하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라는 두 겹(인간짐승)의 이미지하기. 짐승하기는 정서적 유대다. 짐승하기는 짐승으로 취급하기, 인간 이하로 보기와의 자리 바꾸기이다. 나는 짐승하기를 통해 사람과 짐승 혹은 유령 사이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나와 짐승이 서로 흐릿해져서, 어떤 비인칭 지대를 만들고 다시 그곳을 우리가 통과해 간다.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내어주는 다른 주파수의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그 세상에서 서로의 삶을 변용해간다. 그리하여 짐승하기는 분열하기이다.” (p.19)

  “짐승하기의 여행은 나의 외부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짐승의 외밀성의 지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 안에서 일의성의 영토를 힘껏 밀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의 신체와 짐승의 신체가 자발적으로 혼종의 비체를 만들어가는 것. 여자와 짐승을 비천하게 여기는 언어들을 도돌려 나의 짐승하기를 도모해보는 것. 그리하여 닥쳐오는 괴물, 인간짐승인 미래가 되는 것. 새로운 생기의 장에 도착하는 것. 이것이 언어적 담론과 권력에 의해 구성된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지내느라 배제한 여자의, 짐승의, (인간) 아님의 세상을 향해 여행하기를 시도하듯 글을 써나가는 것. 나와 그들의 감응적 전환 속에 있는 것. 우리가 서로 접속된 커다란 장 안에 쥐이면서 나로서, 아시아인인 나로서, 동시적으로 잠재적인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향하여. 그런 곳에서.” (p.21)


  대신 우리는 작가의 이런 여행에서 ‘여자’, ‘짐승’, ‘아시아’에 집중해야만 한다. 여자는 ‘눈의 여자(설인)’로, 짐승은 ‘쥐’로 등장하며 아시아는 ‘붉은 이미지’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텍스트는 실제로 붉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다) 칠해져 있다. 그리고 이 명사에 붙어 있는 ‘~하기’들은 여행 중에 이루어지고 있어, 작가는 자신의 산문집을 ‘여행하기’의 기록이자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나의 글쓰기를 이루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짐승하기에서 식물하기와 풍경하기, 색깔하기 등등으로 점점 나아갔다. 이것은 내가 글쓰기를 통해 근원을 찾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위계 없고 본질 없는 평평한 네트워크의 세계, 잠재적인 것을 실재의 세계로 만난다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짐승과 사물과 풍경의 비밀을 운송하는 여행자처럼 나를 아시아라는 외밀의 광활로 떠밀었다. 나는 마치 제물인 나, 여자짐승을 실어 나르는 매개자인 나로서 아시아를 여행하기를 바랐다... 나는 여자짐승아시아라는 미지의 장소에 사는 희미한 얼굴들, 아직 여행해보지 않은 감각들을 나의 글쓰기로 만나보고자 했다.” (pp.22~23)


  또한 이처럼 지명을 밝히지 않은 채 (목차에 티베트, 인도, 실크로드, 산동성, 운남성, 산서성, 청해성, 미얀마, 캄보디아, 고비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몽골이라는 지명이 소개되어 있기는 하다) 떠나 있음에서 떠나 있음으로 계속되는 작가의 여행은 자신의 글쓰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작가는 “나의 시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라는 끝없는 ‘하기’의 도정 속에 있는 일종의 작용”이라고 여행에 앞서는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글을 쓰는 여성이 스스로의 언어를 발명하려는 지난한 몸짓. 여성성에 ‘들리는’ 과정에서 뾰족하게 솟은 ‘지독하게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의 언어. 그런 글을 읽으면 내 안에 기쁨에 찬 한 여자가 뛰쳐나오리. 바람이 그곳을 지키고 앉아 있다. 사막의 걸레 커튼 밑에서 여자는 하루 종일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여자의 눈동자가 흐리다. 마치 사막에 시달려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p.254)


  긴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는 위의 한 문단으로 맺어지고 있다. 여성을 여성으로 두지 않고 짐승을 짐승으로 두지 않으면서, 혹은 그렇게 가만히 두지 않기 위하여 아시아의 ‘붉은’ 이미지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혹은 그곳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노시인의 모습을 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확인한다. 어떤 원형에서 추출된, 이라기보다는 어떤 원형이 되기 위한 출발의 모습이 읽힌다.



김혜순 / 여자짐승아시아하기 / 문학과지성사 / 253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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