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셔야 하는 숙명과 가방을 잃어버리는 숙명이 문득 떠올라...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하루키가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라는 잡지에 연재한 것들이다. 잡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젊은이들을 상대로 하는 매체여서인지 글의 뉘앙스가 젊다. 물론 하루키도 당시에는 삼십대였으니 젊은 축에 든다고 해야 할텐데, 꽤나 나이든 사람인 척 한다. 그래서 거슬리다는 이야기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럴싸한 아저씨 놀이에 푹 빠진 모양이 귀엽게 느껴진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알알이 전해진다.” (p.70)
전철을 탈 때마다 전철표를 잃어버린다는, 그래서 이런저런 수를 다 써봤지만 소용 없었다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떠올라 혼자 웃었다.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고, 그러면 어김없이 가방을 잃어버려 다음 날이면 한탄을 하는 선배였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헤어지는데 보아하니 선배는 룩색을 한쪽 어깨에 걸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니 맨날 가방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냐며, 양쪽 팔에 끼워 가방이 등에 착 붙도록 만들었다.
“몇 번이고 거듭 말하지만, 이건 거의 숙명이다. 전철표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는 사람은 영원토록 잃어버린다.” (p.97)
다음 날 선배를 발견한 나는 자랑스레 다가갔고 선배도 나를 향해 다가오기는 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선배는 다짜고짜 내 등짝을 후려치며 일갈했다. 너 때문에 가방과 함께 점퍼도 잃어버렸다, 이놈아. 그러니까 선배는 자신의 등에 걸려 있는 가방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고, 그 가방을 벗어내는 방법으로 간단히 팔을 빼내는 대신, 아예 점퍼를 벗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일인데, 어제 우리 집 고양이가 척추가 어긋나서 입원을 했다. 이 고양이는 여덟 살 된 암컷 샴고양이로 ‘대박’ 고양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고양이에는 ‘대박’과 ‘꽝’ 두 종류가 있다. 시계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만은 키워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외모만 봐도 절대로 모른다. 혈통도 소용도 없다. 아무튼 몇 주쯤 길러본 후에야 ‘음, 이놈은 대박이야’라든가 ‘골치 아프군, 꽝이야’라는 걸 겨우 알 수 있는 것이다.“ (p.113)
선배는 자주 내 글에 좋아요, 를 누르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당시의 주량과 술 마시는 속도와 술 마시는 시간 등을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는 딸이 잠시 보호한다며 데리고 온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다며 팁을 알려달라고 했다. 츄르라는 간식이 있는데 애들이 환장하니 가끔 그것을 주라는 이야기를 했던가. 다음에 만나면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되었는지, 하루키 식으로 구분한다면 그 고양이가 ‘대박’인지 ‘꽝’인지나 물어보아야겠다.
“물론 젊으면 다 좋다는 건 아니고. 젊은 세대에게는 또 젊은 세대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심함이 있어서 종종 진저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오만함이나 무신경함은 독립적으로만 기능할 뿐 다른 어떤 권력에 직접 연결돼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상대할 때는 안심이 된다. 내 나이쯤 되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위에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p.270)
그건 그렇고 그때의 선배는 가방 잃어버리는 습관을 어떻게 고쳤던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은 계속 마셨으니 아마도 아예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방법을 택했을 확률이 높다. 등에 매는 가방을 비롯해 그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거추장스러워했고, 다들 공평하게 나이가 들었다. 소소한 권력쯤은 가질 법도 한 나이들이 되었지만 다들 거추장스러웠던 탓인지 그런 것 없이 아직들 젊다. 그래서 안심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역 /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문학동네 / 325쪽 / 2012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