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를 써도 허용되지 않는 것을 향하여 젊음이 허용하였던 것...
얼마 전 아내와의 여행에 세 권의 책과 동행했다. 한 권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였고, 또 한 권은 파스칼 키냐르의 《섹스와 공포》였다. 파스칼 키냐르의 번역 출간된 모든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섹스와 공포》만은 몇 차례 읽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이번만큼은 모두 읽을 작정이었다. 제발트는 접근하기 공포스러워 주저하고 있는 작가였지만 그 시작은 《토성의 고리》여야만 한다고 여겨왔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딱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살짝 차가운기운을 띤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맨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 모습은 없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pp.12~13)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읽었고, 아마도 그때는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이년 쯤이 지난 후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 권 중 어떤 책을 가방에 넣어 기내에 탑승할 것인지, 어떤 책을 캐리어에 넣어 짐으로 부칠 것인지를 두고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도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좌석에 앉았지만 영화만 두 편을 봤다.
“...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갔고 저녁에 근처 피자 하우스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내 손이며 접시며 테이블이며 눈이 닿는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갰다. 그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비롯한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그것은 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 이미 오래전에 어딘가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네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pp.414~415)
리조트의 침대에서 나는 세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고,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잠들기로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천정에서 돌아가는 팬을 의식하고, 책의 활자와 묘하게 겹치고 난 다음부터는 어지럼증이 솟았다. 활자를 읽으려고 할 때마다 천정의 팬이 획획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오코를 향한 와타나베의 애달픈 마음이, 나오코의 알 듯 모를 듯한 나신의 아름다움이 돌아가는 팬을 따라 흩어져버렸다. 나는 번번이 책읽기를 포기하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나는 마치 바다의 바닥을 걸어가는 듯한 기묘한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도 잘 들리지 않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걸어도 그들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마치 나 자신의 몸 주변에 어떤 막이 달라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막 탓에 나는 바깥 세계와 제대로 접촉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 또한 나의 피부에 손을 댈 수 없다. 나도 무력하지만 이런 상태에 놓인 한 그들 또한 나에 대해 무력한 것이다.” (pp.480~481)
그나마 오롯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은 클럽 전용 풀의 카바나에서였다. 아내와 내가 분신을 서너번쯤 해야 자리를 채울 수 있을만한 크기의 카바나를 요리조리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책의 오분의 이쯤을 읽었다. 세 개의 거대한 카바나가 있었지만 아내와 나밖에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제발트를 조금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카바나 덕분이었다.
“나는 나오코를 과거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와 미도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나는 그 힘에서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고, 이대로 그냥 앞으로 휩쓸려 가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상냥하며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게 느끼는 내 감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땅을 밟고 서서 걷고 숨 쉬고 고동치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변명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나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았다. 그런데 왜 이런 미궁 속에 빠져 헤매야 하는지, 난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pp.519~520)
리조트에 있는 동안 서울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와 내가 여행 중일 것이라 짐작했다며 즐거우시라는 짧은 통화로 끝이 났다. 지금 이렇게 리뷰를 적어 나가고 있는데, 그 후배가 오래 전 미도리, 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게 어디였는지 그게 언제쯤이었는지는 애를 써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행에 동행했던 제발트와 파스칼 키냐르의 두 권의 책은 붙박이처럼 책상에 여전히 있다. 애를 쓸 일이 많다. 그러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은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마음을 쏟는 젊음의 이야기인데, 사실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애를 쓸 수 있을 때만 젊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역 /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 / 민음사 / 567쪽 / 2013, 2016, 2019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