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한쪽의 죽음과 한쪽의 불사가 나른하고 몽롱하게 맞닿아 있는...

by 우주에부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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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장자의 <호접몽>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떠오른다. ‘호접몽’이 꿈인지 꿈이 아닌지를 헷갈려하는 꿈인 반면, ‘인셉션’이 꿈임을 인지하는 꿈이라는 ‘자각몽’을 아이디어로 삼는다는 면에서 둘은 다르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이 마구 뒤섞인다는 점에서, 그러다가 그 뒤섞임의 정체를 나중에 알게 된다는 점에서 이 둘을 동시에 떠오르도록 만든다.


“나는 의뢰를 받은 과학자의 지하 실험실로 가서 데이터를 처리했다. 그리고 일각수의 머리뼈 같은 것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훔쳐가려고 했고, 다음 날 아침 의뢰인의 손녀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와서 할아버지가 야미쿠로에게 습격당했으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서로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두 가지의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나는 머리뼈고, 또 하나는 셔플이 끝난 데이터이다...” (p.236, 1권)


소설은 많은 소제목들을 지닌 챕터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챕터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어느 한 세계에 속한 채로 진행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세계의 끝’이 임의로 끌어낸 무의식의 세계라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현실 세계이다. 형식적으로는 이 두 세계가 나란히 존재하고, 두 세계의 이야기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지만 각각의 세계가 지금 당장 양쪽에 영향을 끼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어 있어. 그러나 문제는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어 있는 나름대로 이 도시가 완성되어 있다는 점이야. 모든 게 부자연스럽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로 반듯하게 정리되어버린 거지. 완결되어 있는 거야...” (p.66, 2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나는 계산사이며, 계산사는 셔플링 작업(무의식의 핵을 이용하여 정보를 암호화하거나 암호화된 정보를 다시 알기 쉬운 수치로 나타내는 일)을 한다. 한 박사에게 의뢰받은 셔플링 작업 후 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세계의 끝’의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그림자와 헤어진 채로 커다란 벽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에서 일각수의 머리뼈를 읽어내는 작업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있는 이 세계가 끝난다는 것은 아니네. 세계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끝나는 것이지... 요약하면, 그것이 자네의 의식의 핵인 거야. 자네의 의식이 그리고 있는 것이 세계의 끝인 것이지. 어째서 자네가 그런 것을 의식의 밑바닥에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것이지. 자네의 의식 속에서 세계는 이미 끝나 있어. 거꾸로 말하면 자네의 의식은 세계의 끝 안에서 살고 있는 거야... 거기엔 시간도 없고, 공간의 범위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가치관과 자아도 없네. 그곳에서는 짐승들이 사람들의 자아를 통제하고 있지... 일각수야... 그 도시에는 일각수가 살고 있는 것이지.” (p.106, 2권)


이 두 세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주인공인 나, 뿐이다. 원서에서 ‘세계의 끝’의 나는 ‘보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와따시’로 표시되고 있다고 하는데, ‘보꾸’가 ‘와따시’에 비해 좀더 사적으로 이용되는 일인칭이라고 이해한다면, 내가 창조한 세계 속의 나를 보꾸로, 현실 세계 속의 나를 와따시로 지칭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도서관의 그녀’ 또한 양쪽 세계에 모두 존재하고, 나를 돕는다는 면에서 닮아 있지만 같은 그녀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불사의 세계로 가려 하고 있다고 박사는 말했다. 이 세계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전한이며 거기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 예전에 잃어버렸고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 박사의 말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건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막연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히 나 자신인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불멸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내 편협한 상상력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문제였다...” (pp.245~246, 2권)


소설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시작되고, ‘세계의 끝’에서 끝이 난다. 양쪽의 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이지만, 나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없다. ‘세계의 끝’은 봉인되어 있는 세계여서 언제든 누구든 확인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세계 또한 아니다. 한쪽의 죽음과 한쪽의 불사가 맞닿아 있는 소설은 영 추상적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른하고 몽롱한 문체가 아니었다면 SF 장르로 훌쩍 건너갔을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 김진욱 역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世界の終りとハㅡドボイルド·ワンダㅡランド) / 문학사상 / 1권 422쪽, 2권 375쪽 / 1996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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