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기 보다는' '늘 도착하기를' 바라는 한 여인이 있는 곳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로 먼저 쓰고 그것을 일본어로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문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끝까지 이러한 방식을 고수하면서 완성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일본의 작가가 영어로 먼저 쓰고 그 다음 일본어로 바꿔 쓴 작품을, 그것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은 셈이다.
“봄이 나는 힘들다. 이 계절은 설렘은커녕 기진맥진케 한다. 새 빛은 어지럽고 그 번쩍임은 괴로우며 꽃가루에 눈이 따갑다. 알레르기를 완화시키려면 매일 아침 알약을 복용해야 하지만 약을 먹으면 졸음이 온다... 내 인생의 모든 쓰라린 고랑은 봄과 관련돼 있다. 하나같이 아픈 상처다. 이것 때문에 짙푸른 녹음, 시장에 처음 나온 햇복숭아, 동네 여인들이 입는 살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가 괴롭다. 상실, 배신, 실망만을 떠오르게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지못해 앞으로 떠밀려가야 하는 느낌이 싫다...” (pp.28~29)
그런가하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문맹》이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어떻게 잃었고, 아예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어떻게 문맹의 시간을 보냈는지를 토로하였다. 헝가리어로 이미 작가였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위대한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썼다. 비슷한 예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들 수도 있겠다. 그는 러시아어로 소설을 썼고, 《롤리타》는 영어로 쓴 소설이다.
“8월에 내가 사는 동네는 텅텅 빈다. 대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잠깐 눈부신 아름다움을 발하는 노부인처럼 동네가 시들시들해진다. 일부러 동네에 남아 즐거이 집에 처박혀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맥 빠진 시기, 격한 폐쇄를 참지 못한다. 그런 이들은 기분이 우울해 밖으로 나간다. 나는 8월을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다.” (p.93)
벵골 출신 이민자 가족에서 태어난 줌파 라히리는 집에서는 완벽한 벵골어를 사용하기 위해 애썼고, 학교에서는 물론 영어를 공부했다. 영어 사용자로 유명 소설가의 지위에 올랐으니 영어라는 언어는 충분히 마스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녀는 더 이상 영어로 글을 쓰지 않고 있다, 아니 영어로 글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영어로 된 책을 내지는 않고 있다.
“미혼남인 내 친구는 자기 집에서 조촐한 저녁을 준비하는 걸 좋아한다... 이 집은 어쩐지 장난감 같다. 모서리가 좁고, 짙은 색 대들보가 노출돼 있다. 방들은 작고, 방과 방이 이어져 복도가 없다. 거의 모든 방에 침대가 하나씩 있고 쿠션이 바닥에 쌓여 있으며 책들은 주변에 놓여 있다. 결국 어느 방에서나 언제든 책을 읽거나 잠을 잘 수 있는 집이다. 아이에게는 재미있을 거다. 하지만 내 친구는 칠십 대 우아한 신사, 가족 없는 교양 있는 남자다.” (p.107)
대신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낸 세 번째 책이다. 앞의 두 권이 산문집이었기에 《내가 있는 곳》은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소설이 되었다. 영어로 쓴 소설과는 다르다. 온전히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된 소설의 외양 대신 짧은 에세이가 모여진 형태의 소설이다. 이것을 하나의 스타일로 삼을지, 아니면 아직 완벽하지 않은 이탈리아어 실력 때문에 선택한 자구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닮은꼴 여인은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이 두 문장은 휙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나뭇잎을 떨게 하듯 잠시 내 우울한 마음을 어지럽힌다.” (p.187)
소설은 마흔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의 챕터는 어떤 장소를 주로 제목으로 삼고 있다. 보도, 길, 사무실, 식당, 광장, 대기실, 서점, 박물관, 심리상담사의 집, 발코니, 수영장 등의 장소가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실질적인 장소가 아닌 것들도 하나의 장소처럼 지칭되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음속에서라는 챕터가 그렇다. 그런가하면 언제라고 할 만한 봄에, 겨울에, 햇살 좋은 날에, 잠에서 깨어, 와 같은 챕터들도 있다.
“결국 환경 곧 물리적 공간, 빛, 벽은 아무 상관이 없다...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p.189)
주로 고정된 장소를 작은 제목들로 삼고 있지만 소설은 결국 떠나감을 선택하는 중년의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이라는 표현에 오래 붙잡힐 수 있었다. 머물기와 도착하기, 그 사이에 생략된 많은 장소들이 바로 소설들의 장소였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기차에서’인데, 소설이 끝나고 나서야, 끝날 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 이승수 역 / 내가 있는 곳 (Dove Mi Trovo) / 마음산책 / 199쪽 / 2019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