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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안보윤 외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실과 초현실의 어중간한 경계 사이사이로...

  안보윤 「어떤 진심」

  “... 유란은 여전히 진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진심은 왜 그렇게 빨리 변질될까... 어떤 진심은 진심이라서 한심했다. 어떤 진심은 유통기한이 지닌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쇠 냄새를 풍기며 삭았다. 어떤 진심은 추해졌고 어떤 진심은 다만 견뎌내는 삶으로 전락했다.” (p.23) 작은 종교 공동체의 일원인 유란이 이서라는 인물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다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심, 그러니까 어떤 진심을 우리는 마냥 의심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인가. 거기에 깃들어 있는 어떤 진심의 정체를 추적하고 관찰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안보윤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재검사 이후 하진은 어디에도 불려 가지 않았다. 보건실로 불려 가는 일도, 상담센터로 가 무기력한 질문들을 견디는 일도 없었다. 유영과는 어디에서도 마주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상이었다.” (p.52) ‘가까스로 일상’이라는 표현이야말로 하진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벗어날 가망이 없는 것 같은,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불현듯 다시 그 울타리 안이라는 현실을 자각해야 하는, 그렇게 겨우 유지되고 있는 하진의 ‘가까스로 일상’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문진영 「내 할머니의 모든 것」

  “다만 후에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날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것들이자 유일한 것들을, 단 한 벌의 코트, 한 개의 모자, 한 장의 목도리, 한 켤레의 장갑.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p.69) 엄마는 자신의 엄마인 배정심 여사와 40년 만에 해후하였다. 40년 전에 배정심 여사는 이혼하였고 이후 쭈욱 혼자 살았다. 나에게는 외할머니가 생긴 셈이다. 이혼 전에 몇 차례 가출을 감행하였던 나의 외할머니는 딸과 손녀가 생긴 지금 다시 집을 비우고 사라지고, 손녀인 나는 이제 그 할머니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박지영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 그러니까 ‘염병, 이 정도 돈을 받는데 이것도 못 견디겠어’ 수준의 돌봄 비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른바 염병 비용이었다. 직장인에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씨발 비용이 필요하다면 강선동에게는 염병 비용이 필요했다. 더구나 숨 쉬듯 염병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치매 노인이 아닌가 말이다.” (pp.96~97) 치매에 걸린 아버지 강만석을 돌보는 아들 강선동의 이야기가 심란하다. “강선동은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그랬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착했다...” (p.125) 


  이서수 「엉킨 소매」

  지금 임신 중지를 실행하는 나의 가까운 거리에 해정과 주영 씨라는 두 인물이 있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면 보이는 우리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겠지. 그러나 서로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늘 기다리는 사람들이겠지. 차라리, 입을 다물까. 집이든 몸이든 뭐든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떠들라 하고 우리는 이렇게 아이처럼 장난이나 치며 살까. 하지만 자꾸 울고 싶은 일이 생기는 걸 어쩌나. 어떻게 막을 수 있나.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사건이 우리 가슴에 유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소매가 엉킨 채로 함께 걸어갈 것이다.” (p.156) 아마도 나와 해정, 나와 주영 씨의 이상한 연대를 일컬어 ‘엉킨 소매’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위수정 「몸과 빛」

  죽은 여자와 그녀를 차로 친 남자를 그리고 있다. 그 남자를 죽은 여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크게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다만 나의 장례식에 등장한 영호라는 남자 그리고 나처럼 죽은 영혼인 문수를 그려내는 장면은 흐릿하여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윤보인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오랫동안 계층을 뛰어넘으려 했고, 무주택자로 전전하며 극빈에 극빈을 거듭했고, 그 세월 속에서 악만 남았지만, 빈자라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멸시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씨발, 다 죽여, 라고 소리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고, 아니 마음의 여유가 조금은 생겼지만, 누군가에게 또다시 질시를 받는다 해도,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일만 이제 남았다고.” (p.216) 스무 살 초반 잠시 연애를 하였던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여인의 아들을 앞세워 나타난다. 그래서 로맨탁한 소설은 전혀 아니다. 자그마치 압구정 현대 아파트를 소재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등장하는 내용들이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다른 무엇보다 문장의 리듬감이 대단하다.


  이승은 「우린 정말 몰랐어요」

  시골의 개발에는 보통 찬성과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태경과 명주네에 방문하게 된 선영, 그리고 선영을 오해하는 이들 부부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장욱 「요루」

  유튜브로 정치 평론을 하던 케이는 이제 한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20대 시절 친구로 지냈던 수연의 재혼 상대를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만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수연은 나오지 않고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고 말한다. 상태로 시인은 남자나 한강 다리를 건너다 내려버리는 대리 기사를 비롯해 얼굴을 비치지 않는 수연이라는 인물 등 초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안보윤 <어떤 진심> 외 /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현대문학 / 290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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