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오래된 비이성의 사피엔스 DNA를 거듭 확인하면서도...

by 우주에부는바람


*2018년 10월 1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유발 하리를 처음 본 것은 어떤 케이블 채널에서였다. 그는 이제 막 그 강연의 사회자로부터 (이택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굉장한 우문을 받은 후였다. 그 내용은 모두 잊었지만 그 순간에 홀로 어이없어 하던 느낌만은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이어진 유발 하리리의 답변은 그야말로 현답이었다. 나는 그 현명해 보이는 강연자에게 혹하여 그의 책 『사피엔스』를 곧장 구매하였지만 이제야 그것을 읽었다.


“수렵채집인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계절마다 크게 달랐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 후손인 농부, 양치기, 노동자, 사무원 대부분에 비해서 훨씬 더 안락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풍요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평균 40~45시간 일하며 개발 도상국에선 평균 60시간, 심지어 80시간씩 일한다. 이에 비해, 지구상의 가장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수렵채집인, 예컨대 칼라하리 사막 사람들은 주 평균 35~45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흘에 한 번밖에 사냥에 나서지 않으며 채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 3~6시간에 불과하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 일해도 무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칼라하리보다 더욱 풍요로운 지역에 살았던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식량과 원자재를 획득하는 데 이보다 더 적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이에 더해 이들에게는 가사노동의 부담이 적었다. 접시를 씻고 진공청소기로 카펫을 밀고 마루를 닦고 기저귀를 갈고 청구서를 납부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p.84)


사실 더 일찍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으로 가득한 이 땅의 진상을 보며 부아가 치밀어 그렇게까지 분통을 터뜨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피엔스의 오래된 비이성적 DNA가 여전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용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렵채집인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정착 농경인으로 변신한 12,000년 전의 전통을 DNA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12,000년 전의 농업혁명을 두고 ‘덫’이라고 말한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닐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p.129)


농업혁명은 유발 하라리가 지구 역사를 이해하면서 크게 거론하는 세 개의 혁명 중 하나이다. 첫 번째는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이고, 두 번째가 12,000년 전의 농업혁명이며, 마지막이 5백 년 전의 과학혁명이다. 그래서 책의 네 개의 챕터 중 세 개가 이 혁명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 사이에 ‘인류의 통합’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챕터가 끼어있는데, 아마도 돈과 제국과 종교에 대한 이해가 인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통합적으로 살펴져야 할 무엇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p.19)


책을 읽으며 많은 포스트잇을 사용했다. 그가 강연하는 영상에서 보여준 현명해 보이는 답변들이 책에는 가득했다. 책을 요약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큰 의미도 없어 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인류의 거대한 전환점들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스럽다. 어쩌면 (인류의 가장 가까운 혁명인) 과학혁명이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고, 우리들의 집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논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도 족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가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난, 질병, 노화, 죽음은 인류의 피치못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p.375)


글을 쓰는 파일의 끄트머리에 나는 일종의 사적인 연표를 하나 적어 놓고 있다. 나는 그 연표를 통해 내가 1975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박정희가 죽었을 때 열한 살이었는데 그 전 해에 대전에서 포천으로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때때로 확인한다. 이제 나는 내 사적인 연표에 덧붙여 역사의 연대표 하나를 덧붙였다. 그 연대표에는 135억 년 전 물질과 에너지가 등장했고, 45억 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졌으며,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가 시작되었고, 7만 년 전 인지혁명이, 12,000년 전 농업혁명이, 5백 년 전 과학혁명이, 2백 년 전 산업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 / 조현욱 역 / 이태수 감수 / 사피엔스 (Sapiens) / 김영사 / 636쪽 / 2015 (2011)



ps. 후기에 <신이 된 동물>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이 하나 실려 있다. 작가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서술한 후에 다다른 묵시론적인 선언문에 가깝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주위 환경을 굴복시키고, 식량생산을 늘리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고, 널리 퍼진 교역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는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는 마침내 약간의 실질적인 진보를 이룩했다.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대다수 인간의 상황이 개선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최근의 일이며 확신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불안정하다.

더구나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왕복우주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pp.587~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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