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글 한 토막 어딘가에 담궈두었다가 나중에...
취업을 하고 잠실의 다세대 주택 원룸에 혼자 살았던 적이 있다. 혼자 살고 있을 때, 나는 커티 삭을 마셨다. 조그만 컴퓨터 전용 책상에 앉아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나면 모니터가 파랗게 변하게 되는데, 전화선의 연결음이 띠띠 거리며 세계와 접속하기 위해 용을 쓰는 동안 나는 컵 가득 얼음을 그리고 커티 삭을 가지고 왔다. 한동안은 그렇게 커티 삭만을 마셨다. 커티 삭으로 취하면 기분이 근사했는데, 첫 번째 커티 삭이 두 번째 커티 삭으로, 세 번째 커티 삭으로 이어지면서 근사하였던 기분은 조금씩 옅어졌다.
“커티삭 커티삭 하고 입속으로 몇 번이고 읊조리노라면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커티삭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이미 초록색 병에 든 영국산 위스키가 아니라 실체를 잃어버린 마치 꿈의 꼬리 같은 모양의, 커티삭이라는 원래 말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말의 울림 속에 얼음을 넣어 마시면 맛있다고요” (p.20)
책은 1983년에 출간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와 1986년에 출간된 《랑게르한스섬의 오후》의 합본인데, ‘커티삭’은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 실린 첫 번째 글이다. 글을 읽자마자 나의 이십여 년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촤르륵 페이지가 뒤로 넘어가서 한참 앞쪽의 페이지에는 내가 커티 삭을 홀짝이며 마시고 있다. 그리고 취기 가득한 다음 페이지에는 쓰디 커피를 냉수처럼 마시는 내가 있다.
“정말로 내 마음에 든 것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 그리고 등뒤에는 네모난 틀 속 조그만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 (p.39)
실려 있는 글들은 길지 않다. 작고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고스란히 말려들 수밖에 없는 치기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쩍 던지는데 그것이 또 으스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워 죽겠네, 싶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오랜 세월 더덕이나 뱀이나 땅벌 같은 것 품고 있는 담금주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글 한 토막을 내가 어딘가에 담글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이틀 동안의 축제 기간 내내, 그리 넓지 않은 쌍둥이 마을은 말 그대로 쌍둥이로 만원을 이룬다. 그래서 축제에 휩쓸려든 ‘쌍둥이가 아닌’ 사람은 자신이 쌍둥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 혼란스러워지는 모양이다. ‘왠지 내 반쪽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듯한 기분이다.’ 이것이 ‘쌍둥이가 아닌 사람’들의 감상이다.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길에서 춤추는 아이들을 위협해 돈을 강탈한 쌍둥이 야쿠자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쌍둥이 야쿠자라니 어째 으스스할 것 같다.“ (p.102)
글들 사이사이에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도 실려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사물들을 그린다. 주로 사물들을 그린다.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리는 사물들은 사물 그대로인 것도 있고 사물 그대로가 아니라 사물을 사물화한 사물인 것도 있다. 글과 그림이 쌍둥이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글과는 별개로 글과는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것대로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 나는 말할 줄 아는 개와 생활하고 있다. 물론 말할 줄 아는 개는 극히 드물다. 말할 줄 아는 개와 살기 전에는 아내와 함께 살았다. 작년 봄 시내 광장에서 바자회가 열렸는데, 나는 거기서 말할 줄 아는 개와 아내를 바꿨다. 거래한 상대와 나 둘 중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했지만, 말할 줄 아는 개는 그 무엇보다도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pp.118~119)
책의 두 번째 챕터, 그러니까 《랑게르한스섬의 오후》의 열아홉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 ‘소확행’이다. (랑게르한스라는 이름의 섬이 있는 것은 아니고, 랑게르한스섬은 췌장 전체에 섬 모양으로 산재하는 내분비샘 조직을 말한다) 그 글에서 하루키는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 돌돌 만 깨끗한 팬츠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을 두고 소확행, 그러니까 ‘인생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라고 지칭한다. 더불어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러닝셔츠를 새로 꺼내 머리부터 꿸 때의 기분’도 소확행 중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작가가 아직도 이런 행위들을 소확행으로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김난주 역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 문학동네 / 271쪽 / 2012 (1083,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