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어떤 사랑의 이야기든 터무니없지 않은 '단 하나의 이야기'...

by 우주에부는바람


“...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pp.75~76)


등장인물들 중 유독 조운에게 마음이 갔다. 조운은 수전의 친구인데, 그러니까 마흔 여덟 살인 수전과 같은 나이이거나 어쨌든 그 또래일 거다. 이래저래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전의 연애에 대해 크게 반감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친구인 수전의 연애 상대가 열아홉 살짜리 남자 아이여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조운은 수전과 폴의 연애를 단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게 ‘The one story'는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燒灼)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


소설은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보수적이 중산층 동네에 사는 나, 폴은 대학생이고 그 동네의 테니스 클럽에서 수전 매클라우드를 만났다. 혼합 복식에서 같은 조가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둘의 사랑을 불같은 사랑이었다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연애의 장면들에 대한 묘사는 설명적이고 건조하다. 수전에게는 남편이 있고, 두 딸이 있다. 폴은 수전의 딸들보다 어리다. 두 사람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도 안 되고, 가망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수십 년째 작은 공책을 보관해왔다. 그 안에 사람들이 사랑에 관해 한 말을 적었다. 위대한 소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현자, 자조(自助)를 돕는 스승, 오랜 세월 이어진 출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는 증거를 모았다. 그러 다음, 이 년 정도마다 쓴 것을 살피면서 이제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인용은 다 줄을 그어 지워버렸다. 보통 이렇게 하면 그에게 겨우 두세 개의 잠정적 진실만 남았다...” (p.289)


하지만 ‘단 하나의 이야기’는 가속 페달을 밟아버린다.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면 이제 두 사람은 동네를 떠나 폴의 대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함께 산다. 폴은 수전이 그녀의 술취한 남편 고든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대학 친구들 중 일부는 두 사람의 유니크한 관계를 인정하고, 또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 관계는 완벽하지 못하다. 수전은 가끔 동네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혼하지 않았고, 두 명의 딸이 있었고, 어쨌든 이것은 오십 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이며, 수전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 그의 심장, 그래,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계속했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 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pp.301~302)


세 번째 챕터에서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한다. 수전은 늙었고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폴의 노력은 제대로 가닿지 않는다. 수전의 딸들 중 한 명이 어머니를 보살피기로 한다. 수전의 남편 고든은 죽었고, 폴은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한다. 폴은 몇 차례 여자를 만났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수전이 죽기 얼마 전 그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영화와 같은 마지막 한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몇 번의 검열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공책의 한 기록.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그는 처음 이 말을 발견한 이후로 계속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더 넓은 생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 자체가 절대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 그 참가자들 누구도 그렇지 않다는 것. 한 사회가 강요하려 하는 감정과 행동의 모든 엄격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것을 미끄러져 지나쳐버린다...』 (p.304)


소설의 세 챕터는 완전하지 않지만 인칭에 변화가 있다. 첫 번째 챕터는 일인칭, 두 번째 챕터는 주로 이인칭, 세 번째 챕터는 삼인칭으로 진행된다. 사랑에 대한 잠언과도 같은 이야기가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탓에 이러한 인칭의 변화가 소설을 읽어내는 일에 크게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러한 인칭 변화의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다. 어쩌면 폴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서서히 우리들의 ‘단 하나의 이야기’로 바꿔가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줄리언 반스 Julian Barns / 정영목 역 /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 / 다산책방 / 383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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