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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9. 2024

유시민 《역사의 역사》

역사가와 역사 서술에 대한 유시민 식의 '역사 르포르타주'...

*2018년 9월 2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역사가 무엇인지 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보려는 의도는 없다.’ 서문에서 유시민은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역사학 이론과 역사 서술 방법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인 사학사, 그러니까 역사학의 역사를 다루는 대신 ‘역사 서술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학술 연구가 아니라 문학적 창작 행위에 가까운 ‘역사 르포르타주’로 받아들여줄 것을 권한다.


  “... 역사가는 과거의 모든 사실을 수집할 수 없다. 유적과 유물은 과거의 파편을 보여줄 뿐이다. 문헌 기록 역시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일부 사실만 담고 있다. 게다가 역사가는 사료를 통해 수집한 사실을 전부 기술하지 않으며, 아는 사실을 다 기술한다고 해서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는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을 중심으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 사실을 엮어 이야기를 만든다... 역사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에 따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실을 선택하며 같은 사실로도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사실의 선택은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 영역에 속하며, 역사가의 주관은 개인적 기질, 경험, 학습, 물질적 이해관계, 사회적 지위, 역사 서술의 목적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좌우한다.” (pp.137~138)


  이와 함께 유시민은 자신이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듣고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될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고, 독자인 우리들이 자신과 함께 그러한 여정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작가는 우리가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가들과 그들의 저서를 한 자리에 모아 놓음으로써, 역사가 그리고 그 역사가의 역사 서술 방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돕는다.


  “헤르도토스에게 역사 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 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 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pp.212~213)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가 그리고 그들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헤르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마천의 《사기》,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레오폴트 폰 랑케의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와 《강대 세력들·정치 대담·자서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 균 ·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실들을 일정한 관계로 맺어 주는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그래서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먼 과거에 관한 것이라도 역사는 현대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p.235)


  많은 부분 이미 존재하는 저작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유시민의 어떤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하나는 역사가는 아무리 객관적이고자 노력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주관이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국 역사는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어서인지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아래와 같이 ‘역사의 역사’의 방향에 대해 밝히고 있기도 하다.


  “첫째, 역사가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더 정확하고 더 수월하게 획득하고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과학이 발전한 덕분에 역사가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셋째, 인간 공동체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졌으며 인간이 귀속감을 느끼는 집단의 크기와 역사 서술의 단위도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넷째, 인간 공동체는 점차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진화했으며 역사가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고 더 다양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pp.316~317)


  2018년 9월 20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오후 현재, 평양 정상 회담을 위해 평양에 들렀고 백두산 천지에 손 담갔던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시간들 중 보기 드물게 주목 받을만한 역사적 시간 중의 하나가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적 행위에 대한 평가가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역사가 아닌 역사가들이 즐비한데, 모두가 본 사실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모양이 가관이다. 그들 중 일부는 거의 주술사에 가깝다.



유시민 / 역사의 역사 (History of Wrighting History) / 돌베개 / 335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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