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인 미식가로 살아 남아 하루키 읽기...
“... 제 안에 커다란 캐비닛이 있고 서랍이 잔뜩 달려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기억의 서랍이 알아서 탁 열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서랍이 아무리 많아도······ 소설을 쓰다 말고 일일이 열어보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저기 있다, 하고 그때그때 서랍들이 자동으로 속속 열려주지 않으면 실제로는 쓸모가 없어요... 어디 있는지 대강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 못한 서랍이 탁 열리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의외성이 없으면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하죠...” (pp.21~22)
그러니까 김유신의 말 같은 신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는 브랜드가 들어가 있는 책이 등장하면 일단 산다. (하루키는 이것을 작가인 자신과 독자들 사이의 신용 관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읽어 낸다.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을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 인더스트리즈’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거위 쯤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거위가 낳은 그 무엇을 탐하는 미식가쯤일 수도 있다. 죽지 않고 독자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미식가가 낫겠다.
“... 자아 레벨, 지상 의식 레벨에서는 대개 보이스의 호응이 얕아요. 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면 언뜻 똑같아 보여도 배음의 깊이가 다르죠.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p.41)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터뷰이로 하여 소설가인 가와카미 미에코가 네 번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다. 2015년에 첫 번째 인터뷰가 있었는데, 양자가 모두 만족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17년 세 번에 걸친 인터뷰가 성사된다. 그때는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가 출판된 다음이었고, 그래서 그 세 번의 인터뷰에서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 이천 매 남짓한 장편소설을 쓰려면 일 년에서 일 년 반, 이 년 정도의 시간이 들죠. 무언가와 싸운다, 격투한다는 굳은 각오 없이는 계속 이야기를 써나갈 수 없습니다. 기분좋게, 싱글벙글 즐겁게 책상 앞에 앉아만 있어서는 장편소설을 쓰지 못해요. 그러니 무언가와 싸워야 하는데 대체 무엇과 싸워야 하느냐 하면, 제 경우는 대개 잘 보이지 않는 일, 알 수 없는 일이 그 상대가 된단 말이죠.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성격상 무언가에 강한 증오를 품거나, 싸우거나 화를 내거나, 비난하거나, 현실에서 누군가와 다투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상당히 개인적인 인간이라, 화나는 일이 생겨도 ‘할 수 없지’ 하고 혼자 삭이는 타입이죠. 현실세계에서는 웬만해선 싸우지 못해요. 소설세계에서도 싸울 상대를 찾아내는 게 적잖이 어렵습니다. 본래 그런 일에 능한 사람도 있죠. 이를테면 굉장히 불쾌한 캐릭터를 내놓고 그와 싸우는 것으로 소설을 회전시키는 사람도 있고요. 하지만 전 그런 걸 잘 못해요.” (pp.90~91)
이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창작관을 다룬바 있지만 이 책의 많은 부분에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두 책을 비교한다면 일종의 ‘번복’이라고 부를 법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어가 이전의 글 등을 예로 들어 하루키에게 무언가를 물을 때 하루키는 어리둥절해 하기도 한다. 자신이 말을 했었는지, 그런 글을 쓴 것이 맞는지 되묻기도 한다.
“... 저는 보이스, 스타일, 말투를 매우 중요시하죠. 제 소설은 너무 쉽게 읽힌다는 말을 곧잘 듣는데, 당연합니다, 그게 저의 ‘동굴 스타일’이니까... 일단 눈앞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거죠. 그러니 늘 하는 말이지만, 뭐가 됐든 알기 쉬운 말, 읽기 쉬운 말로 소설을 쓰려 해요.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자, 마른오징어처럼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 하죠. 한 번에 ‘흠, 이런 거군’ 하고 씹어삼키는 게 아니라 몇 번이고 곱씹고, 씹을수록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떠받치는 문장은 어디까지나 읽기 쉽고 순수한 것을 사용하고 싶어요. 그게 제 소설 스타일의 기본입니다...” (p.105)
그래도 그가 자신의 소설 창작론의 일부라고 보여주는 것들, 서랍이 잔뜩 달린 캐비닛을 충분히 채워놓고 소설을 쓸 때 서랍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 쓴다는 ‘캐비닛론’이나, 무의식의 영역이며 위험한 공간인 지하 2층 (1층은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장소, 2층은 좀더 개인적인 공간, 지하 1층은 조금 음침한 자아의 공간인 집에서 지하 1층과 연결된 공간))을 언급하는 부분들은 재미있다.
“... 전 그저 그것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고, 진짜 이데아,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냥 이데아라는 말을 빌려온 거죠. 어감이 좋아서. 게다가 기사단장이 ‘나는 이데아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을 뿐, 그가 진짜 이데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라요.” (p.163)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이데아와 메타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놀랍다고 해야 할까, 어이없다고 해야 할까, 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인터뷰를 위해 플라톤을 읽고 온 인터뷰어에게 하루키는 자신은 이 책을 쓰는 동안 ‘이데아’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처음에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대답이 농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키는 실제로 그렇다고 몇 번이나 답해준다.
“... 제게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p.198)
그렇게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는 동안, 그간 자신이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이데아, 라는 개념 이상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데아’라는 단어를 향한 어렴풋한 인상을 가지고 글을 썼고, 그 뉘앙스를 최대한 발현하는 차원에서 문장을 만든 것이다. 이후 이데아니 메타포니, 소설에 등장하는 것들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읽는 사람의 몫으로 돌린다.
"예컨대 저는 딱히 ‘이 세계는 신비롭고 환상적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초자연적인 현상도 잘 믿지 않고, 괴담이나 귀신도 마찬가지죠. 점성술 같은 것에도 전혀 흥미가 없어요. 어쩌면 그런 비정합적인 현상이 어딘가에서 일어날지도 모르고 결코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나와는 크게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굉장히 산문적이고 비非스피리추얼한 세계관이죠. 그런데 이야기를 쓸 때면,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나가려고 하는데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비정합적인 세계를 그리게 돼버립니다. 영문 모를 것이 속속 등장하죠. 이것이 ‘세계를 신비적,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세계를 신비적, 환상적으로 그리는’ 것은 별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pp.270~271)
하루키를 향하여 일종의 애증 같은 것이 있다. 오랜 시간 하루키의 독자였던 것이나 지금도 그의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아직도 하루키를 읽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실은 얼마 전에는 영화 《버닝》을 보고 난 다음 그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다시 읽기도 했다. (《반딧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집에 실려 있다) 하루키의 단편들을 읽는 일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실 저는 소설가가 될 줄 몰랐고 특별히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상상도 안 해봤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고, 제게는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 자체가 첫번째 놀라움입니다. 가계를 운영하면서 부업 삼아 소설을 쓰다가 전업작가가 된 것이 두번째 놀라움이고요. 외국에서 책이 제법 팔리게 된 것이 세번째 놀라움. 그런 놀라움이 하나하나 쌓여나갈 뿐이지, 지금 와서 무슨 생각을 해봐야 별 소용이 없지 않나 싶어요.” (p.313)
가와카미 미에코 (인터뷰어)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이) / 홍은주 역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みみずくは黃昏に飛びたつ) / 문학동네 / 358쪽 / 2018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