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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김호영 《아무튼, 로드무비》

지체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정체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2018년 8월 1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동생 내외와 조카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 주 월요일에 돌아온다고 했다. 다음 달 초인 9월 2일 아내가 일본으로 4박 5일 일정의 출장을 떠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고양이 용이의 투약에 대해 걱정하였다. 우리는 십육 개월에 걸쳐 팀 워크를 갈고 닦아 왔고, 그 매카니즘 안에서만 고양이 용이를 보살폈다. 9월 5일에는 매일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카페 크문을 운영하는 두 명의 사장이 일본으로 떠난다. 열흘 동안의 휴가를 그곳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 가끔 삶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내 생의 모든 순간들이 필름 위에 새겨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이름 모를 로드무비의 일부인 건 아닌지, 의혹에 빠져들곤 한다.” (p.16)


  1988년 대학 신입생 시절 첫 번째 만취를 경험했다.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양쪽 어깨를 걸고 있던 두 명의 선배가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내 발 아래로 지나가던 아스팔트, 횡단보도 혹은 차선에 도포된 흰색 선이 휙휙 내 눈 아래로 지나가는 것은 기억난다. 많은 로드 무비의 클리셰라고 할법한 장면이었다. 선배네 집에서 잠깬 다음 날, 선배의 어머니가 널부러져 있는 우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배에게 던졌던 일갈도 기억난다. 이놈아 빤스는 갈아입고 다니는 거냐. 나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그저 숨죽이고만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행이란 깨달음의 도정(道程)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을 통한 자아 성장이나 세상의 발견 같은 건, 개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여행을 가서 자아를 성장시키고 세상을 발견할 인간들은 떠나지 않고 살던 데에 계속 살아도 잘 성장하고 잘 발견할 이들이라는 것을.” (p.27)


  젊은 시절 많은 시간 길 위에 있었다. 봄에 집을 나왔다가 여름에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영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찾아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당시 86학번의 선배 누나가 어머니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그 선배를 잊지 않고 내게 근황을 묻고는 하였다. 누나는 이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그 누나에 대해 묻지 않는다.


  『... 그리고 리스본을 떠나는 기차역에서 그는 주변 사람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 자기 자신에게 혹은 그녀에게 이렇게 적는다. “나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 로사는 떠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유일한 나라는 바다야.”』 (p.70, 알렝 타네의 영화 <백색 도시>의 대사 중)


  책에는 많은 로드 무비들이 등장한다. 데니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1969), 빔 밴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를 비롯한 영화들,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1984), 알렝 타네 감독의 <백색 도시>(1983), 미국의 로드 무비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 <올리브나무 사이로>(1994)와 같은 길 위의 영화들이 나온다.   


  “길이 있기에 삶이 이어진다. 길은 동네와 동네, 장소와 장소를 이어주지만, 과거와 현재도 이어준다. 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떠올릴 수 있고, 과거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길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줄 뿐 아니라 시간과 시간도 이어준다. 시간은 늘 공간을 파괴하고 공간에 새겨진 기억 또한 앗아가버리지만, (길을 포함한) 공간은 시간을 이어주고 종종 그 기억도 되살아나게 해준다.” (p.137)


  생각해보니 길 위에서 지체하는 시간을 가져본지 오래되었다. 바쁘다는 말만으로는, 내게는 돌봐야 할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합리화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어머니는 나를 한량이라고 불렀고 나는 충분히 정지해 있은 다음에 움직이면서 살았던 적이 있다. 이제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그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지체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정체되고 있다니 아이러니인데, 그게 또 삶이려니 한다.



김호영 / 아무튼, 로드무비 / 위고 / 143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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