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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이 떠나짐에 가까운 여행기를 읽다...

   내 천성에 구시렁구시렁은 없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구시렁구시렁은 많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공간에서는 구시렁구시렁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 그리고 책을 읽을 때는 종종 구시렁구시렁 하고는 한다. 김연수의 이번 산문집을 읽으면서 종종 구시렁구시렁 하였다. 자의로 타의로 여행을 떠다니는 작가가 한 달에 한 번 론리 플래닛 매거진에 실었다는 여행기의 모음집인데, 나는 보다 신선한 주제와 문체를 그리고 주체를 원하였나보다.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 생활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p.75)

  - 컬렉터의 컬렉션 하나하나에는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컬렉션을 위해 자신이 치른 비용이나 컬렉션의 현재의 가치보다도 컬렉터와 컬렉션 사이에 이루어진 많은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 권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컬렉션으로도 충분하다. 피규어 하나 그림 한 점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소설 한 권이 품고 있는 어떤 인물의 평생의 이야기를 등치해 보아도 좋다.


  “음, 그러나 컴퓨터가 더 중요해졌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당시 김정흠 교수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대학교 1학년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리라고 예언했는데, 틀린 말도 아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종일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게임에 몰두하느라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준이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떨어진 것 같으니까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인 셈이다...” (p.113)

  - 작가가 <소년중앙>파 였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김정흠, 이라는 이름을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데, 듣고 보니 나에게도 낯설지 않다. 당시의 대중적인 과학자가 말한 내용을 지금 나도 되새긴다. 대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이 초등학교 5학년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건 요즘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향 평준화된 교양을 걱정하는 건 좋은데, 또 그래서 이 시대의 교양은 대저 무어냐, 싶기도 하다.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이처럼 상대성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빈민이 많은 저개발국을 여행하고 돌아오면, 미안하지만 한국에서 사는 게 참 행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유럽 여행 뒤에 바라보는 한국은 전생에 나쁜 일을 하다가 죽은 이들이 오는 곳 같기도 하다. 당연히 한국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한국은 그저 한국이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지역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 (p.121)

  - 오래전 일본 여행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일본을 발견하지 못하여 섭섭했던 적이 있다. 신혼 여행 때의 이야기니 이십 년 전의 이야기이다. 일종의 열패감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다미 깔린 게스트하우스에서 몇몇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같잖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기타노 다케시의 복장에 기가 차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제이 팝이나 잔뜩 들었던 주제에...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삶은 잘 짜인 픽션이다. 삶은 여행에 곧잘 비유되니, 그렇다면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들려주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pp.235~236)

  - 작가는 자신의 사진 없는 여행기를 이런 식으로 옹호하고 있다. 몇몇 글은 아주 재미있지만 많은 글들은 마감에 맞추어, 정해진 분량 안에서, 기승전결의 논리를 채우기 위하여 애쓴 흔적이 들여다보이곤 해서 싱겁다. 자의에 의한 떠남과 타의에 의한 떠나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글에는 그 떠나짐에 대한 피로감이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연수 / 언젠가, 아마도 / 컬처그라퍼 / 263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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