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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황현산 《사소한 부탁》

에두르지 않고 정제된 문장에서 확인되는 마음...

*2018년 8월 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더위가 이러니 책을 읽는 일의 진척도 더디다.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온도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다. 진득하지 못하다고 채근을 하는 아내도 간혹 강력제습을 누르라고 명령한다. 이 더할 나위 없는 온도에 숨겨진 습도를 꼼꼼하게 찾아서 없애달라고 주문하는 격이다. 하지만 흡족하지 못하다. 더우니 자꾸 마시고 자꾸 마시니 숨결에도 습한 기운이 가득한가 보다. 


  “...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p.185)


  이 더위에 광화문에서 여성들의 ‘불법촬영 규탄시위’ 가 있었다는 뉴스를 본다. 여성들에 의해 조직되고 여성들만 참여가 가능한 시위였다. 경찰청장이 비공식 일정으로 집회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의 건너편에서였다. 이번이 네 번째 집회이고, 이전의 집회는 대학로에서 진행되었다. 간혹 집회에서의 과격한 구호가 인구에 회자되고는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였다가 주억거렸다가 하면서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늘 실권을 장악해왔다. 권력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또다른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그 남성적 세계의 외부를 대상하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화된 세계가 이번에는 남자만의 세계를 승인하고 만다. 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여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 수동적 존재들을 통해서 남성적 세계의 적극성이 확인된다는 말인데, 남자다운 세계는 남자답지 않은 세계를 끝없이 생산할 때만 존속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 바로 남자다운 세계의 아이러니가 있다.” (p.213)


  1945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칠십 넷인 작가이지만 그의 산문집에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의견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꽤나 심각한 가부장제의 시절을 살아낸 선생이고, 꽤나 오랜 시간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에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엄두를 내지 않고 살았을 것인데, 변화된 그리고 더욱 변해야 할 세상에 등 돌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어 안심된다. 부족한대로 이렇게 나이 들어갈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고은 선생은 자신의 파렴치한 행동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이들을, 그러니까 자신의 문학 후배들을 향하여 법적인 역공을 가하기 시작하였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게 될 것이냐, 와는 별개로 자신의 명예를 찾아보겠노라는 이런 행동조차 늙은 욕심으로 읽힌다. 나이 들어가는 두 노작가의 별개의 행적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 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는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p.144)


  번역가로 알려진 작가의 산문집을 두 권째 읽었다. 책은 다섯 개의 챕터로 되어 있는데 앞의 세 개 챕터는 시평時評이라고 할 수 있겠고, 나머지 두 개 챕터는 문예 비평이나 서평으로 채워져 있다. 문예 비평이나 서평을 읽을 때는 시평을 읽을 때와는 조금 다른 자세로 읽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가닿을 곳에 있을 이들을 위한 마음이 에두르지 않고 정제된 문장에서 확인된다.



황현산 / 사소한 부탁 / 난다 / 342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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