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김창남 《나의 문화편력기 : 기억과 의미의 역사》

축약된 채로 호출되는 유년의 기억들 틈틈이...

  내가 태어난 곳은 원주인데 거기서는 육 개월을 살았을 뿐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원주 이외에도 전주와 남원에서도 살았다. 대전에 살고 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내 유년의 기억의 시작은 그러니까 대전에서부터이다. (원주는 여동생이 결혼 후 잠시 머문 적이 있고 난 조카들을 보러 방문한 적이 있다. 남원은 대학시절 지리산 종주 후 하산길에 들른 적이 있고, 전주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어 몇 년 전 자동차로 다녀왔다.)


  “... 축약된 동화 본들에는 원작에 담겨 있는 인물 하나하나의 구구절절한 역사는 모두 사라지고 최소한의 스토리만 앙상하게 남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독서 체험이 그 시절 내게 소중한 것이긴 했지만,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동화 본들을 통해 갖게 된 알량한 지식들이 이미 그 방대한 책들을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 ‘제대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을 그만큼 약화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pp.34~35)


  그렇게 내 기억의 역사는 대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대전의 갈마동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도심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동네였다. 동네 근처에 논이 있어 추수 끝난 그 자리의 볏단 위에서 씨름을 하다 팔이 빠졌다. 그 이후 수시로 접골원을 다녀야 했다. 어쩌면 팔이 빠져 거동이 쉽지 않은 동안 책 읽는 취미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주로 계몽사에서 나온 오십 권짜리 전집류를 읽기 시작했다.


  갈마동에서 문화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호남선이 지나가는 기차역인 서대전역 근처였다. 어린 시절의 꿈 중에 하나가 기관사였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아직 동네에 공터가 많았고 서커스단이 커다란 천막을 치곤 했다. 학교 가는 길에 생사탕 집이 있었고, 똥차를 보면 재수가 좋다는 말이 있었고, 방역차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동네 개천에 버려진 도색 잡지의 찢어진 페이지를 처음 봤고, 학교 앞에 처음 오락기가 생겼다. 왼쪽과 오른쪽에 움직이는 바가 있고 느리게 횡단하는 공을 막아내는 게임이었다. 


  “아마도 이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텐데, 용가리가 히트를 쳤던 당시에는 만화 쪽에도 《용가리》 아류작들이 출몰했다. 개나 말 같은 동물의 돌연변이 괴물들이 등장하는 《개가리》, 《말가리》 같은 만화가 있었고, 심지어 《올가리》(거대한 돌연변이 올챙이가 나온다.)도 있었다. 이 돌연변이 동물 만화 시리지를 그린 사람은 김경언(경인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다.)이란 작가다.” (p.100)


  대전에서 경기도 포천의 소읍인 송우리로 이사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대전에서는 아파트에 살았고 송우리에서는 개량된 한옥집에 살았다. 화장실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그 집의 한쪽 벽은 양조장과 그리고 다른 한쪽 벽은 다방과 맞닿아 있었다. 세로 얻은 집의 한 칸을 다시 세를 주었는데 그곳에 만화 가게가 들어왔다. 갓난애가 있는 신혼부부였는데 만화 가게가 들어오기 전 그곳 마룻바닥에서 팽이를 돌리고는 했다.


  그곳에 살면서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 갔다가 처음 컬러 텔레비전을 구경할 수 있었다.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책에 등장하는 것처럼 서울에 사는 이들이 보는 만화영화가 우리가 볼 수 있는 만화영화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처음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직 겨울이면 얼었던 개천이 봄이면 녹으면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냈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의 묘소 근처에 밤나들이를 하는 것으로 담력 테스트를 할 때였다.


  “... 그때만 해도 춘천에서는 추가 요금을 내고 유선 안테나를 설치하지 않는 한 KBS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TV를 얻어보던 시절 나는 <여로>란 드라마를 대강 볼 수 있었지만, <아씨>란 드라마는 볼 수 없었다. 또 주로 TBC에서 방송되었던 <쇼쇼쇼> 같은 오락 프로그램, <황금박쥐>, <요괴인간> 같은 만화영화도 보지 못했다.(TBC와 MBC를 보기 힘들었던 것은 FM 라디오를 잘 들을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서울내기들과 나 사이에 그 만큼의 문화자본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p.199)


  저자와 나 사이에 십여 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작은 차이는 아닌가보다. 분명 겹치지 않는 시간 보다는 겹치는 시간이 더 많을 터인데, 그보다는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들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각각의 나이대에 각인되는 것들 간에 차이가 있고, 그 부분에서 아귀가 맞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 그래도 덕분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꾸 불러낼 수 있었다. 



김창남 / 나의 문화편력기 : 기억과 의미의 역사 / 정안책방 / 321쪽 / 2015 (2015) 

매거진의 이전글 이승우 《만든 눈물 참은 눈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