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 허스트베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성이면서 여성, 창작자이면서 비평가인 작가의...

by 우주에부는바람

*2018년 7월 1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예술, 인문학, 그리고 과학을 사랑한다. 나는 소설가이며 페미니스트이다. 그리고 열정적인 독서가이다. 나의 관점은 날마다 일상적으로 책을 읽는 삶을 통해 여러 분야의 책과 논문을 읽으며 꾸준히 변화하고 수정된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로 다른 작가들의 목소리로 가득차 있지만, 이 목소리들이 언제나 조화를 이루는 건 아니다. 이 책은 이러한 복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든, 어떻게든 의미를 창출해 보려는 시도이다.” (p.295, 옮긴이의 말에 실린 시리 허스트베트의 말)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라는 제목이 번역 출간하는 출판사에 의해 만들어진 제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현상태를 드러내는 다양한 운동과 퍼포머스 그리고 퍼포머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짐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A Woman Looking at Men Looking at Woman’, 원제가 그랬다. 다만 ‘예술, 성 그리고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부제는 출판사에 의해 붙여진 것 같다.


“그림을 볼 때 나는 나 자신을 보지 않는다. 캔버스 속 가상의 인물을 본다. 나 자신을 잃고 사라져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 - 경외감 · 짜증 · 괴로움 · 경탄 - 은 의식하고 있더라도, 지각이 한동안 그림 속 인물로 꽉 메워져 버리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동안 그 여자는 ‘나의 일부’이며 나중에 기억할 때도 ‘나의 일부’이다. 기억 속 그 여인은 내가 직접 그림을 마주하고 본 여인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보다는 내 마음속에 간직된 어떤 상像에 가깝다. 그림을 지각하는 사이, 나는 그림 속 가상의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된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 베크만의 가면을 쓴 <콜럼바인>, 데쿠닝의 뻐드렁니 괴물 <여인 Ⅱ>. 나는 그 여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당신 또한 그렇다... 예술작품에는 성별이 없다... 화가의 성은 작품의 젠더를 결정하지 않는다. 작품의 젠더는 어느 쪽으로든 정해질 수 있고, 다양한 판본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pp.12~13)


『... 소규모 디너파티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녀는 나를 보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이제까지 통틀어 최고의 논문을 썼더군요.” ... 실제로 그녀는 《위대한 개츠비》를 다룬 모든 논문을 읽어본 걸까? 아무튼 가슴 깊이 뿌듯한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손택이 물었다. “왜 그런지 알아요?” ... 이건 어떤 작가에게 하더라도 이상한 질문이다. 자기가 쓴 글이 좋을 수 있는 이유쯤은 알아야겠지만, 다른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쓴 글이라서 그래요.” 손택이 말했다.

... 나는 원래 무슨 분야이든 ‘최고’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불신하는 편이다. 다른 것보다 ‘나은’ 문학적 양식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글을 쓰는 데는 규칙도 처방전도 단 하나의 길도 있을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판단을 유보한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 있고, 좋은 독자와 나쁜 독자도 있지만, 고정된 위계질서를 확립해두는 것은 소용도 없거니와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제는 방대해진 내 독서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소용이 닿을 경우 수용된 지식, 다른 출처에서 도매금으로 거둬들인 개념, 죽은 표현들을 좀 더 수월하게 파악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도 최고의 글을 쓸 때는 밖에서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썼다. 성적 욕망에 깃든 광기의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충격적 초월에 대한 글을 쓸 때, 손택의 산문은 빨라졌다. 자기 내면의 경험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독서에서 나오는 격동 · 생경함 · 열정을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손택의 《은인》이 대체로 밖에서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소설이 지향해야 할 경지에 대한 관념과 원칙과 이론에 기반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뜻이다. ‘안’에 대한 그 논평은 나에 대한 진정성 있는 찬사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가끔 자기 작품에 나타나곤 하는 완고한 현대성에 대한 비평이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책들이 밖에서 안으로 쓰인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바깥이 안이 된다. 나를 변화시키는 모든 책이 내가 된다. 그 낯선 음악, 리듬, 생각, 그리고 스토리가 내 몸 안에 자리 잡고 내 글 속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그때쯤이면 나는 그것들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pp.166~169)


피카소 등의 그림을 보고 쓴 에세이, 손택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강연을 듣고 쓴 에세이, 자신의 심리 및 정신 분석을 토대로 하여 쓴 에세이 등이 실려 있으므로 충실한 부제이다. 그리고 시리 허스트버트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 그리고 사회적 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인 그리고 생물학적은 판단의 준거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만 그것들의 옮고 그름을 주장하기 보다는 날것 그대로 피력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한때 어머니의 몸속에 있었다. 모두 한때 유아였고, 그때 어머니는 거대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 기억은 전혀 없지만, 우리의 운동감각적 · 정서인지적 학습은 의식적 기억에 한참 앞서 시작된다. 심지어 우리는 출생 전부터 시작된 학습 과정, 그리고 그 후 언어와 문화와 젠더화된 삶에 따라 나오는 무수한 상징적 연상들에 의해 형성된다. 그것이 세상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 사이에 경계를 새겨, 우리가 서로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고 느껴지게 한다.” (p.37)


“여자아이들이 남성적 형식을 탐색할 때는 남자아이들이 여성적 형식을 탐색할 때보다 훨씬 운신의 폭이 넓다. 소년이 머리핀을 달 때와는 달리, 소녀가 쇼트커트를 하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고 대단한 주목을 끌지도 않는다. 우리 문화에서는 여자아이가 ‘남성적인 것’에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남자아이가 ‘여성적인 것’에 오염되는 것이 훨씬 더 해롭기 때문이다...” (pp.119~120)


시리 허스트버트의 소설들을 좋아하여 몇몇 지인들에게 권하고는 하였다. 예술 혹은 예술가를 등장시키는 작가의 소설들은 지적이면서 감정적으로도 풍부하였다. 나는 심지어 시리 허스트버트의 남편인 폴 오스터보다도 시리 허스트버트의 소설들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곰곰이 비교하기도 하였다. (책에 실린 에세이에서 작가는 자신의 몇몇 소설을 이용하거나 인용하기도 한다. 《불타는 세계》와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이 인용되었고, 이외에도 두 권의 소설이 더 , 《남자 없는 여름》과 《내가 사랑했던 것》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삶의 기억 중에 감정을 수반하지 않는 것도 있나? 감정은 정확하든 아니든 모든 기억의 기저에 있다. 뭔가를 기억할 때와 상상할 때 두뇌의 똑같은 부위가 작동한다는 신경생물학적 증거가 축적되고 있다. 과거의 자아를 회상할 때뿐 아니라, 미래로 자아를 투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기억은 허구이기 일쑤다. 우리가 없는 기억을 일부러 꾸며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실은 다큐멘터리의 진실과는 다르다.” (p.262)


작가의 미술 에세이 《사각형의 신비》는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뒤로 미뤄 놓았다. 《살다, 생각하다, 바라보다》는 다른 책들에 눌린 채로 어딘가에 놓여져 있는데, 《사각형의 신비》 다음으로 미뤄져 있는 상태이다. 보고 읽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심사 숙고하여 작성하는 작가의 산문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리라 여기고 있는데, 그것들을 읽는 일은 때때로 힘겨울 수 있다.


『에른스트 크리스는 에이브러험 카플란과 협업해서 쓴 논문 <미학적 모호성>에 “‘사유하는 인간’과 ‘감정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과학자와 예술가의 대조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근원적 이원론과 마찬가지로 별 이득이 없다. 추론 과정은 다양한 강도의 감정에 각인되어 있다. 미학적 활동 속에 체현되는 감정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오로지 숙고할 때만 생겨나는 복잡한 패턴을 지닌 구조의 일환으로서 어우러진다”라고 썼다... 감정은 허구적일 수가 없다. 내가 꿈을 꾸거나 책을 읽거나 내 소설 속에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꾸며낼 때 두려움 또는 기쁨을 느낀다면, 비록 그 등장인물들은 현실이 아니더라도 내가 느끼는 사랑과 공포는 현실이다. 바로 이것이 픽션의 진실이다.』 (p.267)


작가가 취하고 있는 젠더의 관점에서 예술 작품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이번에는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시리 허스트버트에게 그녀가 쓴 소설의 일부는 혹시 폴 오스터가 쓴 것이 아닌지 묻는 장면이 등장하였을 때 작가 본인이 되기로도 한 듯 난감하였다. 이외에도 남성주의적 시각이 만연해 있는 예술계(예술 생산의 영역과 예술 소비의 영역 양쪽을 포함하는)를 확연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은 수시로등장한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고 사회적인 여성으로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여러 고심의 흔적은,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비평가라는 위치를 갖는 작가에게 포착된 여러 예술 작품과 상황에 의하여 뚜렷하면서도 골고루 퍼진 채로 확인된다.


“모든 예술가는 거절 · 비평 · 오해를 비롯해 예술을 창작하는 삶이 가져오는 수많은 형태의 불행에 맞서기 위해 적응성 과대 성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녀들과 성인 여성들의 경우에도, 끝없는 성차별주의 - 성차별주의는 보호자연하는 태도, 생색, 두려움과 편견 등 다양한 형태로 찾아온다 - 에 맞서기 위해 상당한 과대 성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부풀려진 자아의식이 다급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덕분에 열심히 일해야 할 필요성 -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할 필요성 - 고 그럴 가치가 있다는 도착적 믿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p.281)



시리 허스트버트 Siri Hustvedt / 김선형 역 /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A Woman Looking at Men Looking at Woman) / 뮤진트리 / 303쪽 / 2018 (2016)


ps. 얼마 전 만난 선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전위적인)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여성과 남성을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급진적인)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무브먼트 하는 것은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납득하기 쉽지 않아요.” 물론 선배는 동의하지 않았고 나 또한 나의 말에 대해 내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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