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과거의 보행을 살피며 현재의 보행을 설정하고 미래의 보행을 짐작해보다..

by 우주에부는바람

“...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 할까...” (p.20)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그만 몇 권의 책에 추월당했다. 나는 《걷기의 인문학》을 김솔의 소설, 전성원의 서평집, 철지난 EBS의 지식e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등과 겹쳐 읽었고, 《걷기의 인문학》은 그 모두에게 추월당했다. 《걷기의 인문학》을 그만큼 느리게 독서한 결과였다면 그나마 낫겠으나, 어쩌면 다른 책들을 너무 빨리 읽은 결과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 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pp.116~117)

걷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학시절의 한 83학번 선배이다. 그는 주로 등산화를 신고 다녔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오래 걸을 수 있기 위한 준비였다. 그는 때때로 마포에 있는 학교에서 술을 마시고, 사당 근처의 집까지 걸어서 가곤 했다. 어느 땐가 나는 선배의 귀갓길에 동행한 적이 있는데, 이태원 해밀턴 호텔의 화장실을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남은 술기운으로 그곳까지 가서 이제 한강 다리를 건너기 전에 선배는 마지막 화장실일 수 있다며 그곳을 이용하기를 권했다. 태어나서 호텔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서 일을)본 날이었다.

“보행 수필은 육체적, 정신적 자유를 찬양하는 장르였을 뿐, 자유로운 세계를 혁명적으로 열어 보이는 장르는 아니었다. 그 혁명은 이미 일어난 후였다. 보행 수필이 한 일은 자유가 얼마나 허용될 수 있는가를 서술함으로써 그 혁명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p.200)

최근에 걷기, 하면 떠오르는 이 또한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87학번 선배다. 그녀는 내가 알기로 어지간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한다. 날씨가 좋으면 보다 많이 걷고, 정처 없이 걸을 때도 있지만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걷기도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대학시절 술자리에서 종종 뛰쳐나가고, 쫓아오는 이들을 뿌리쳐 달아나고는 했는데, 아마도 지금의 걷는 속도는 그것보다는 느릴 것이다.

“... 소유가 땅을 여러 조각으로 구분하는 경계선에 주목한다면, 보행은 유기체 전체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일종의 순환계로서의 길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소유와는 상반된다. 보행은 땅을 소유하는 대신 땅을 경험한다. 움직이는 중의 경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경험, 모두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경험이다...” (p.264)

나는 서른 넘어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 한동안, 책에 나오는 개념에 어울리는 보행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삼전동에 살던 나는 느지막히 일어나 신문을 챙겨들고 집에서 가까운 뚝방을 넘어 탄천으로 그리고 내처 한강까지 걸어가곤 했다.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모여든 낚시꾼들 옆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내처 걸어 잠실대교 아래까지 걷고는 했다. 그렇게 다시 집에 돌아오면 해는 저물었고 아내가 퇴근할 즈음이었다.

“보행을 위해 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이상하다. 실제로 보행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자주 언급하는 독립, 고독, 자유는 조직과 통솔이 없는 데서 온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즐거움을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자유로운 시간, 자유롭게 걸을 장소, 질병이나 사회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육체가 그것이다. 이 기본적 자유는 무수한 투쟁의 목적이 되어왔다...” (p.273)

나는 자동차를 구매할 의사가 없었지만 운전면허는 있었고 자궁근종 수술을 앞두고 있던 아내는 자신이 우리의 차로 이동하면 좋겠다고 했다. 십년 전쯤의 일이다. 그 후로 나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것을 모르는 도둑처럼 길들여졌다. 더 이상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고, 걷는 일에 소홀해졌다. 차를 운전하며 이동하는 중에 보게 되는 풍경을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고, 여태 나는 풍경에 눈 감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도시는 언제나 익명성, 다양성, 혼합성(걸을 때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속성들)을 제공해왔다. 빵집이나 점집을 마주치면 지금은 그냥 지나가더라도 나중에 들어가볼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사는 도시의 모든 것을 알기는 불가능하다. 대도시의 미지와 가능성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p.278)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의 원제는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이다. 방랑벽:, 보행의 역사‘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책에는 루소를 필두로 하여 여러 철학가들과 문학가들 그리고 순례자들을 비롯한 걷기의 선각자들이 등장한다. 책은 그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보행의 역사‘를, 우리에게 DNA처럼 각인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방랑벽‘을 끄집어내어 우리들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 이동 기계화가 여가를 늘리기보다는 속도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는 것은 대부분의 ‘시간 절약형’ 기술력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지금 미국인이 30년 전보다 시간이 더 모자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장이 생산 속도를 높였다고 해서 사람들이 차를 타는 시간이 단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수시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게 됐다.(예를 들어 현재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날마다 서너 시간을 출퇴근 운전에 소비한다.) 사람들이 안 걷게 된 것은 걸을 만한 장소가 없어져서이기도 하지만 걸을 시간이 없어져서이기도 하다. 생각과 연애와 몽상과 구경이 펼쳐지던 자유분방한 사색의 시공간이 이제 없어졌다. 기계는 더 빨라지고 있고, 삶은 열심히 기계를 따라가고 있다.” (p.414)

책을 읽는 동안 책 읽기를 멈추고 몇 차례 홍제천으로 나아갔다. 길 잃은 잉어들이 손 그림자를 딸라 우우 몰려다니는 다리 아래를 바라보며, 오후의 오수를 즐기려 모여서 날갯죽지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비둘기들이 점령한 낮은 다리 위를 걸었다. 전동 휠체어가 막 지나간 자리를 노란 트레이닝 슈트가 뛰어가고, 무릎 높이의 아이가 뒤뚱거리는 사이 목줄에 가해지는 힘에 반려인이 휘청거렸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장소는 상상력의 풀밭이다. 이 풀밭은 상상력 가운데서도 아직 경작되지 않은 장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장소, 당장 써먹기는 힘든 장소다. 나비, 초원, 강변 나무숲은 시장에 내다팔 곡물을 산출하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게 환경주의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상상력의 풀밭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은 척박해지고 아둔해지고 길들여진다. 길들여지지 않은 장소와 공공장소라는 자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는 그 공간을 거닐 자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풀밭은 당장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상품들, 자극적인 실제 범죄 이야기들과 유명인의 위기에 소문들만을 파는 체인점 아웃렛만 잔뜩 들어선 땅으로 개간될 것이다...” (pp.463~464)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낮이든 밤이든, 그러나 가능하기도 하였고 가능하지 않기도 하였든 보행의 역사를 읽는 일이 느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거나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고 있거나 누릴 수 없어 누리지 못하고 있는 보행의 양태들을 떠올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된 현재, 그리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보행의 미래를 생각해볼 일이다.

“보행은 인간 문화라는 밤하늘의 성좌로 자리 잡았다. 그 성좌는 육체, 상상력, 드넓은 세상이라는 세 별로 이루어져 있다. 세 별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보행의 문화적 의미라는 하나의 선이 별들을 이어 성좌로 만든다. 성좌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설정이다. 별과 별을 잇는 선, 곧 성좌는 과거 사람들의 상상력이 지나간 길이다. 보행이라는 성좌에는 역사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반란자들, 무단횡단자들과 호객 창녀들과 순례자들과 관광객들과 정글 탐험가들과 등산가들이 두 발로 디뎌서 만든 역사다. 다만 이 역사에 미래가 있는가 여부는 아직 그 길들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pp.465~466)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 김정아 역 / 걷기의 인문학: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 / 반비 / 510쪽 / 20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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