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를 가운데에 놓고, 이천 년 전의 작가와 이천 년 후의 작가가
“...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을, 그리스 신화나 도깨비들이 나오는 동화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 고대에는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때는 사람들이 순진했고, 과학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날에는! ... 설사 믿음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들을 진지하게 대해 주지. 또 그들은 어떤 사회적 역할도 담당하고 있어. 과거처럼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존중받으며 전반적으로 볼 때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그들의 황당무계한 생각들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들과 공존하고 있는 거야. 대통령들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공손한 태도로 방문하기도 하고. 자, 이것 참 희한한 일 아니야?” (pp.13~14)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었고 직업 군인에게 교회와 테니스는 디폴트 값 같은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는 정구를 중학교 때는 테니스를 쳤다. 일요일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품은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군인과 그 군인 가족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닐 때는 품지 못했던 의문이었다. 그러한 군인 교회는 일종의 사교장 같은 것이어서 친구들을 만나는 공간이었을 뿐, 딱히 신을 믿는 장소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 나는 너무 쉽게 연결 짓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1세기에 지중해 연안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유대교에 대한 이러한 열광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의 불교에 대한 그것과 약간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보다 인간적이고도 순수한, 게다가 꺼져 가는 이교(異敎)에는 없는 영혼의 개념까지 갖춘 종교였다. 나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얼마만큼 자신들의 신화를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5세기 후에 그들과 그들을 정복한 로마인들은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쨌든 그들 중 대부분은 마치 우리가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듯이 그들의 신화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들을 행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 혹은 성모 승천절을 지키는 것과 같은 식이었다. 그들은 불벼락을 휘두르는 제우스를 요즘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믿는 것처럼, 다시 말해서 어렸을 때만, 반신반의하며 믿었다...” (p.165)
아버지와 떨어져 서울에 정착을 하고 나서 다닌 교회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작은 개척 교회였다. 이성 친구를 사귈 기회가 적었던 당시 학창 시절의 분위기에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사교 학습장 같은 역할을 했다. 나는 나름대로 그곳에서 관련 학습을 하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장소가 장소이다보니 신을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지만, 나는 꽤나 회의적이었고 전도사와 몇 차례 부딪쳤다.
“나는 행여 그렇게 될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던 사람이 되고 말았다... 회의론자 말이다. 불가지론자. 무신론자가 될 믿음조차 없는 불가지론자가 된 것이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믿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과거의 내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은, 그러고도 내가 꽤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p.159)
내가 품은 가장 큰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 신은 지옥이라는 것을 만들었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강요하면서 신은 왜 사랑과 용서로 모든 사람을 품으면 될 것을, 굳이 자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지옥이라는 난관을 강요하고 있지?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은 왜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용서하기 싫은 것까지 용서하기를 강요했으면서...
“종교사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잘 알려진 현상이 하나 있다. 현실이 보여주는 반대 증거들은 어떤 신앙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구루가 어떤 정확한, 그리고 가까운 날짜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예고하면, 우리는 낄낄댄다. 우리는 그의 무모함에 놀란다. 어쩌다가 예고가 실현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고된 시간이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추종자들은 정상적이라면 그들의 망상에서 치료되어, 신흥 종파를 떠나야 옳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리적인 자들, 지미근한 자들, 떠난다 해도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라고 자신을 확신시킨다... 만일 그들이 감각의 증언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성의 요구들에서 벗어난다면, 미친놈으로 여겨질 각오가 되어 있으면, 그들은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 선택된 이들이다. 하늘의 왕국은 그들의 것이다.” (pp.263~264)
그때 이후 나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신이 있어도 상관없지만 교회는 없는 편이 낫다,는 무교회주의자 쯤으로 여태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는데,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간혹 소설을 읽을 때 난관에 부닥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성경을 다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최근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은 것이 가장 근접한 책읽기였다. (지금은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이 소설에 연이어 읽으니 좋다. 이후에는 기회가 있을 때 《예수평전》을 읽어볼 생각이다.)
“... 외국인은 자기 나라의 어떤 신을 위한 사원을, 마치 오늘날 외국 음식 전문 식당들을 열 듯이 자유로이 열 수 있었다. 대중은 거기에 가든지 안 가든지 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보여 주었다. 만일 어떤 경쟁자가 등장했을 때, 최악의 상황은 그가 남의 고객을 빼돌리는 것인데, 이게 바로 바오로가 비난받았던 점이다... 내가 지금 묘사하려 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그 간단한 개념조차 없었던 어떤 전면적인 종교 전쟁보다는, 오늘날 요가 학원이나 무술 학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 물론 다른 곳들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아는 것만을 말하겠다 - 어떤 현상과 더 비슷하다. 상급에 이른 어떤 제자가 같은 제자들 중 일부를 스스로 가르치려 하거나, 혹은 외부로 끌고 나간다. 스승은 공개적으로 혼을 낸다. 어떤 제자들은 원만하게 처신코자 이쪽에서 한 시간, 저쪽에서 한 시간 수업을 들으면서, 자, 이렇게 양쪽의 장점을 취하는 거야, 하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p.215)
소설은 어느 정도 자전적이다. 소설가 엠마뉘엘 카레르는 소설가로 데뷔한 젊은 시절의 어느 때 잠시 종교에 몰두한 적이 있다. 일종의 회심, 그러니까 잠시 신을 잃고 있던 그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 것이었다. 자신의 대모였던 자클린 여사의 공이 컸고, 그때 만나게 된 에르베라는 친구와는 그 이후, 그러니까 다시금 신으로부터 멀어진 이후에도 만남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다.
“... 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 (p.389)
그러던 작가는 기독교라는(작가의 현재를 고려하자면 카톨릭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황당무계한 설정, 그리고 그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광범위하게 성장한 그 배경에 의구심을 품게 되고, 바로 이 회심의 시절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소설은 작가 자신과 그리고 4대 복음서 중 하나인 <루카복음(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를 오고가며 초기 기독교의 시절, 그러니까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광경을 그려내고 있다.
“... 사실 이 시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 얼마 안 가서 모두가 똑같은, 매우 한정된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먼저 기독교도들이 쓴 『신약』. 좀 더 나중에 나온 위경들, 사해 사본. 항상 똑같은 이교도 저자 몇 사람. 즉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소(小)플리니우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세푸스. 이게 전부다...” (p.342)
작가는 랍비에게서 교육을 받은 유대교도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며 초기 기독교를 유대 바깥의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였던 사도 바오로, 그리고 바오로를 따르면서 <사도행전> 그리고 4대 복음서 중 하나인 <루카복음(누가복음)>을 작성한 그리스 출신 의사였던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루카를 비교해가면서 당시의 기독교와 유대교, 예루살렘과 로마 일원에 대해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애쓴다.
“... 루카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그의 책을 침대에 누워서 썼다고 가정해 보자. 이불 위에 널려 있는 것들을 훑어보자면, 먼저 『70인 역 성경』이, 그다음에는 그가 직접 베껴 쓴 「마르코 복음서」가, 마지막으로 카이사리아에서 필립보가 빌려준 것을, 역시 그가 직접 베껴 쓴 예수의 어록이 보인다. 그가 항상 여행 궤짝 밑바닥에 소중히 간직하는 이 조그만 두루마리는 그의 보물이다. 이것은 마르코에 대한 그의 강점이기도 한 바, 마르코는 이게 없었던 탓에 예수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빈약했던 것이다. 『70인 역 성경』, 「마르코 복음서」, 그리고 『Q』, 이 셋이 그가 주로 참고한 자료였고, 나는 여기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p.613~614)
물론 이제 작가는 회심했던 시기, 이십 년도 더 된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럴 생각도 없다. 그는 이제 요가와 명상으로 자신을 다스린다. 신에게 의지하면서 동시에 정신과에 다니던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의구심이나 작가적인 호기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작가는 루카를 복음의 전파자가 아니라 성경의 한 부분에 포함되는 작품을 쓴 한 명의 동료 작가로 인식한다.
“인도의 한 현인이 삼사라와 니르바나에 대해 말한다. 삼사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변화와 욕망과 고통의 세계이다. 니르바나는 깨달은 자가 들어가는 행복과 지복의 세상이다. 하지만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삼사라와 니르바나를 구별하는 사람은 삼사라에 있다. 이 둘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사람은 니르바나에 있다.> ... 나는 왕국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pp.657~658)
소설은 한 명의 작가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과거의 기독교라는 종교의 시작 즈음을 조명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 기독교의 현재에 의해 영향을 받은 바 있다. 소설 속 또 한 명의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루카는 기독교의 발원이 되는 시기에 살고 있었고 그 시기를 그려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역할이 이천 년이 흘러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이 교회는 늙었다. 그것의 등에는 무거운 과거가 얹혀있다. 이 교회가 인류 역사상 가장 반체제적인 랍비, 나자렛 예수의 메시지를 배반했다고 비난할 수 있는 논거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교회가 이렇게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되었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수는 이 유기체의 유년기였고, 바오로와 초기의 교회는 반항적이고도 열정적인 청소년기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과 더불어 서구기독교의 긴 역사가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무거운 책무들과 대단한 성공들과 엄청난 권한들과 타협들과 부끄러운 과오들로 채워지는 성인(成人)의 삶과 전문적 커리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계몽사상과 근대성은 은퇴의 시간이 왔음을 알렸다. 이제 교회는 실무에서 물러났고, 전성기가 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가 아주 무관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것의 노년이 과연 고약한 치매증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신의 노년에 이르고 싶어 하는 - 적어도 나는 그렇다 - 그 빛나는 지혜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pp.675~676)
교회로부터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소설을 읽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품은 의문이 몹쓸 짓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안심할 수 있었다. 연로한 부모님은 아직 교회를 다니고 있다. 어머님은 얼마 전 기도 덕분에 좋은 값에 집을 팔아서 일 억 원 이상의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는 동료 신도의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무교회주의자로 살아가는 삶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다.
“내가 여기서 마치게 될 이 책을 나는 진심을 다해 썼지만, 책이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 나보다 훨씬 큰 것이기 때문에, 이 진심이라는 것은 가소로운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쓴 이 책은 나의 어떠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똑똑한 자, 부유한 자, 높은 곳에 있는 자들 - 모두가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다 - 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책과 작별하는 이 순간 자문해 본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p.693)
엠마뉘엘 카레르 Emmanuel Carrère / 임호경 역 / 왕국 (Le Royaume) / 열린책들 / 697쪽 / 2018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