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없이 그저 에너지만으로 받아들이려...

by 우주에부는바람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라는 주제는 언제나 한 발 늦어 새롭지 않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책에는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라는 챕터가 두 번 등장한다. 한국문학은 가능한가, 한국문학의 위기, 그러다가 우주에서 온 편지, 시흥의 밤 오한기에서 오한기로, 우리가 미래다, 와 같은 챕터는 한 번 등장한다. 어쨌거나 사실 중요한 것은 새롭다고 판명되는 순간 그 순간부터 많은 것들은 새롭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 혹은 이미 새롭지 않게 된 다음에야 새로운 것으로 판명되고는 한다는 사실...


“전통적인 소설이 2013년 현재에 더이상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수의에 수의를 한 겹 더 두른 것뿐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대개의 소설이 취하는 더딘 발걸음은 우리 삶의 속도에도, 삶에 대한 의식의 속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대개의 소설이 인간 행동을 탐구하는 방식은 여태까지도 인지과학과 DNA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훨씬 더 의존한다. 대개의 소설이 배경을 그리는 방식은, 발자크에게 사람들이 사는 장소가 중요했던 것 만큼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는 곳이 중요하다고 보는 식이다. 대개의 소설이 결정적 순간을 그리는 방식은, 마치 히치콕 영화에서 그대로 딴 것처럼, 영화로 찍으면 될 것 같은 일련의 장면이다. 무엇보다도, 대개의 소설이 보여주는 단정한 일관성은 - 호평받는 작품들이 유달리 그렇다 - 세상을 지휘하는 신성이 존재한다는 믿음, 아니면 최소한 존재에 유의미한 목적이 있다는 믿음을 암시하는데, 솔직히 작가 자신도 그렇게 믿을 것 같지 않거니와, 그럼으로써 우리를 감싸고 침투하고 아도하는 혼돈과 엔트로피를 깜박 잊게 만든다.” (pp.16~17,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중 재인용)


그러니까 책은 새롭거나 새롭지 않은 것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새로움을 꿈꾸는 두 명의 작가, 한 명은 서평가 혹은 무엇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소설가인 두 명의 작가가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하고 자유분방한 만담집과 같다. 책의 앞부분, 작가세계 연재 원고들에서는 세 권의 책들을 두 사람의 만담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저 하고 싶은 말들을 마냥 뿜어댄다.


“... 우리가 말한 새로운 문학은 형식상의 새로움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내용상의 새로움은 당연히 더욱 아니며(그런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니)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제목은 하나의 상투적이고 무의미한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이 지속적으로 떠올랐고 생각도 없으면서 이 질문을 하자고 말한 것에는 어떤 돌파구, 어떤 종류의 우울함과 쓸쓸함과 불결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러니까 단어가 가진 의미로서의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가 아니라 뭔가가 가능하기라도 할까,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라는 의미로서, 우리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할 뭔가가,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과도 결별하고 독자들을 현혹하려는 상업주의와도 결별하고 나이브한 자기만족이나 자기애와도 결별하고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이상과도 결결하고도 가능한 무언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에 조금이라도 꿈과 희망, 동심을 가져다줄 소설을 앞으로 일 년 안에, 아니 죽기 전까지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투덜거려도 이십 대에는 가끔 만났던 것 같기도 한데, 라는 생각.” (pp.36~37)


책은 두 사람이 함께 쓴 글의 모음인데 글자 그대로이다. 금정연의 글과 정지돈의 글이 별도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두 사람은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아마도 편집자에 의해서 곱게 정리되어 있다. 형식 또한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아서, 교환된 서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 불쑥 시나리오가 등장하고 작가들이 그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무엇무엇에 대한 고찰, 류의 끼어들기는 형식 파괴 축에 들지도 않는다.


“... 저는 소설이나 시, 또는 다른 예술작품의 경우 작가가 업무에 등 떠밀리듯 만들면 좋을 확률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편지는 그 반대지요. 편지는 우리의 맨살을 드러냅니다. 예술적 맨살이 아니라 진짜 맨살, 생활의 맨살요. 그리고 늘 그렇듯 생활의 맨살은 우리가 비참할 때만 매력적입니다. 비참과 피로, 고통은 후대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카프카의 절망은 문학의 영원한 포카리스웨트 아닌가요. 한국문학의 위기란 어쩌면 진심 어린 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 있긴 하군요.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p.87)


책의 후반부는 오한기 그리고 이상우라는 작가 혹은 후장사실주의라는 PPL이 포함되어 있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예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그러니까 저것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일련의 제스처야, 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읽는다. 어쨌든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책장 어느 구석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숨어 있던 오한기의 소설집을 끌어내어 만지는데 성공했다.


“... 가령 어제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내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돈씨 전 고양이 못 만져요. 오하기가 말했다. 그런데 왜 키워요? 내가 물었다. 오한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요? 저는 개도 못 만져요. 지돈씨는 만질 수 있어요? 그럼요. 심지어 키운 적도 있는데요. 저도 키운 적 있어요! 오한기가 답답한 듯 말했다. 그러나 답답한 건 나였다. 못 만지다면서 어떻게 키웠어요? 안 만졌는데요. 오한기가 다시 말했다. 키웠는데 한 번도 안 만졌음. 사촌누나가 어릴 때 물리는 걸 봐서 개나 고양이는 못 만져요. 오한기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데 안 키울래요. 여자친구가 싫다고 했어요. 오한기가 다시 말했다. 나는 내가 무슨 대화를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키우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오한기는 왜 내게 말을 건 걸까. 그는 가끔 나를 케이크라고 불렀고 나는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케이크예요? 케이크에는 크림이랑 초코랑 호두가 들어 있어요. 그 이상은 설명 못하겠어요. 나는 오한기의 말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 부조리한 대화 역시 이해는커녕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의 답답함을 금정연에게 말하자 금정연은 이렇게 말했다. 호두가 들어 있는 케이크는 없습니다.” (pp.114~115)


투덜대거나 은근히 눈을 내리깔면서 책을 봤다고 할 수 있는데, 분명 이십대였다면 아주 재미있게 읽었을 거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 없이 그저 에너지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이들 중 누군가가 어떤 영화 감독을 향해 은근한 구애의 제스처를 보일 때에도 그것이 그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형식의 일단에 머물렀으면 싶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이들의 후장사실주의는 어디쯤 가 있나... 그렇게 나는 2015년의 오한기의 소설집을 읽으며, 한참 늦어 새로움과 직면할 예정이고...



금정연 정지돈 / 문학의 기쁨 / 루페 / 237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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