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페이지 남짓 네 편의 산문에 깃든 여든 생의 마지막 흔적...
*2018년 1월 1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종종 출근을 할 때 그리고 퇴근을 할 때 엄마를 모신다. 해가 바뀌어서 엄마는 일흔일곱 살이 되었다. 어느 날 옆 자리에 앉은 엄마에게 지금이 아니라 몇 년 후를 대비하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지금보다 더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또 그때대로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바로 그때를 위해 지금 무언가를 하시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옆자리의 나를 잠깐 바라봤고, 나는 애써 모른 척 하였다.
“... 여든 살이 된 사람은 긴 인생을 경험했다.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남들의 인생도 경험했다. 승리와 비극을, 호황과 불황을, 혁명과 전쟁을, 위대한 성취와 깊은 모호함을 목격했다. 거창한 이론이 생겨났다가 완강하게 버티는 사실들에 못 이겨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덧없는 것을 좀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아마도 아름다움까지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된다. 여든 살이 되면 이전 나이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장기적인 시각과 자신이 역사를 몸소 살아냈다는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된다. 나는 이제 한 세기가 어떤 시간인지를 상상할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마흔이나 예순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p.20, <수은> 중)
책에는 <수은>, <나의 생애>, <나의 주기율표> <안식일>이라는 네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길지 않은 글들이라서 책을 만든 이들이 쓴 들어가며, 라는 장을 모두 합하여도 육십 페이지 남짓이다. <수은>은 2013년 7월, 올리버 색스가 여든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글이다. 여든 살이라는 나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든 살이라는 나이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는 지난 십 년가량 또래들의 죽음을 점점 더 많이 의식해 왔다. 내 세대가 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갑작스러운 분리처럼, 내 일부가 뜯겨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다 사라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라도 그와 같은 사람은 둘이 없는 법이다.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수 없다. 그들이 남긴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마다 독특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고,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죽음을 죽는 것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 유전적, 신경학적 - 운명이기 때문이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p.29, <나의 생애> 중)
2015년 초, 올리버 색스는 안구 흑색종이라는 자신의 병이 간으로 전이됐다는 사실, 살 수 있는 날이 6개월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온 더 무브》라는 제목의 자서전 원고를 마무리한 다음이었다. 그는 <나의 생애>라는 글을 썼고, 삶의 연장을 위한 치료를 결정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이 글을 뉴욕타임스에 보내달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글 받고 이틀 뒤에 지면에 실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으며, 올리버 색스는 다행스럽게도 회복되었다.
“비스무트는 83번 원소다. 나는 살아서 83번째 생일을 맞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주변에 온통 ‘83’이 널려 있는 것이 어쩐지 희망차게 느껴진다. 어쩐지 격려가 된다. 게다가 나는 금속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눈길 주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인 수수한 회색 금속 비스무트를 각별히 좋아한다. 의사로서 잘못된 취급을 받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환자들에게 마음이 가는 내 성격은 무기물의 세계에까지 진출하여,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비스무트에게 마음이 가고 마는 것이다.
내가 (84번째) 폴로늄 생일을 맞지 못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강하고 살인적인 방사성을 띤 폴로늄을 주변에 놓아두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 책상, 즉 나의 주기율표 반대쪽 끄트머리에는 아름답게 절삭된 (4번 원소) 베릴륨 조각이 놓여 있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곧 끝날 내 인생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었는지를.“ (pp.49~40, <나의 주기율표> 중)
수술을 받고 삼 개월 정도, 2015년 5월과 6월 그리고 7월초, 올리버 색스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나의 주기율표>는 그 시기에 씌어졌다. 원자번호 50번은 주석, 원소기호는 Sn 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잔을 하나 살 작정을 했다. 십년도 더 된 유리잔에 맥주와 소주를 적당히 타서 마시고는 했는데, 잔을 바꿔줄 때가 되었다, 그 주석 잔을 이용할 때마다 올리버 색스를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제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한때 단단했던 근육이 암에 녹아 버린 지금, 나는 갈수록 초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이 쏠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안식일, 휴식의 날, 한 주의 일곱 번째 날,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곱 번째 날로 자꾸만 생각이 쏠린다. 우리가 자신이 한 일을 다 마쳤다고 느끼면서 떳떳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그날로.” (p.56, <안식일> 중)
2015년 8월이 되면서 올리버 색스의 건강이 나빠졌다. 발병과 치료 그리고 재발, 여든 살이 넘은 나이, 모든 것이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회복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무언가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이 시기에 쓴 글이 바로 책에 실린 <안식일>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이 발표되고 이주일이 지난 2015년 8월 30일에 숨을 거두었다.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 김명남 역 / 고맙습니다 (Gratitude) / 알마 / 62쪽 / 2016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