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주인은 이제 서재가 가리키는 방향에 책임을 져야 하고...
결혼하고 십여 년이 지나 첫 번째 이사를 하면서 아내와 나는 슬라이드 책장을 장만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두 사람의 책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족한 공간에서 억지로 동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각자 취향에 따라 각자 책을 구매하였으므로 처음보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나의 방을 온전히 책의 방으로 꾸몄고 우리는 그곳을 책방이라고 불렀다.
“... 은퇴를 결심하게 되면 목수로서의 마지막 작업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사용할 책상과 책장, 그리고 죽고 나서 쓸 관 하나를 짤 생각이다...” (p.7)
우리의 이사는 책의 이사였다. 책이 머물게 될 방의 치수를 재고 그 치수에 맞춰 슬라이드가 들어갈 책장과 그렇지 않을 책장의 규모를 결정했다. 우리와 함께 이사하게 될 책과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책들을 고르느라 고된 일과 뒤에도 쉴 수 없었다. 이사를 한 뒤에는 책에 맞는 책장의 위치를 정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꽂는 일은 한 달이 지나도 온전히 끝을 내지 못했다.
“... 내게 서재와 공방은 별도의 공간이 아니다. 서재는 공방의 연장이며, 공방은 서재의 확장이다.” (p.10)
재작년 아내의 나의 두 번째 이사가 있었다. 우리는 여러 해를 함께 했던 슬라이드 책장과 같은 날 이사를 왔다. 책장은 분해와 조립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고, 약간의 변형도 감수해야 했지만 지금의 책의 방으로 고스란히 옮겨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몇 개의 책장을 추가하였다. 방의 한 가운데 책상을 놓고, 그 책상을 낮은 책장 네 개가 눈높이에서 감싸도록 했다. 방에는 좁다란 통로만 남았고, 그 통로에 고양이들의 잠자리 몇 개가 놓여졌다.
“서재의 중심은 책상이다. 책상은 서재의 문패와도 같다. 책상이 있다면 그 공간을 서재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가장 완벽한 서재는 책상 하나가 놓인 적절한 크기의 텅 빈 공간일 것이다. 책장이 인풋의 장치라면 책상은 아웃풋의 도구이다. 책장이 인트로라면 책상은 메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책상은 ‘나’라는 주체성의 기물적 상징이다. 독립된 인간은 반드시 자기만의 책상을 소유해야만 한다.” (p.35)
이번에도 책장 정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반 출신인 아내가 다리를 쫙 벌려 그 사이에 책을 늘어놓고 순서를 정하는 기술을 선보였음에도 그랬다. 구획을 정하고 그에 합당한 책들을 분류하고 다시 그것들의 배열 순서를 정하여 꽂는 일은 이제 재미있지도 않았다. 구획과 그 구획에 맞는 책들을 꽂는 선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남는 시간에 새로 산 책을 읽었다.
『... ‘취향’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이다. 세상 모두가 찬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취향이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작고 단정한 책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반드시 나의 아름다움일 필요는 없다. ‘카오스의 책상’을 소유한 폴 스미스 역시 나와 같은 타인들의 반응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취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취향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나는 더 이상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을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취향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취향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종류의 취향에 열려 있는 사람이다. 유일하게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매너 없는 태도이다.”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타인의 취향을 질책하는 태도만이 유일하게 그를 뿐이다.』 (pp.45~46)
책장과 책상, 그리고 책으로 이루어진 서재를 갖는 일이, 그러니까 그것들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런 서재를 갖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조금은 안다. 게다가 서재는 주인의 성정을 빼닮지 않을 수 없다. 나이든 자의 얼굴이 나이든 자의 세월이 각인됨을 각오해야 하듯이 서재의 주인은 서재가 가리키고 있는 바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나는 지금 아내와 내가 책방이라고 부르는 곳의 책상에 앉아 있다.
김윤관 / 아무튼, 서재 / 제철소 / 139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