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고독의 권유》

길에서 지체된 시간, 후미진 벌건 등 깜박거림이 만든 두통을 달래며...

by 우주에부는바람

*2017년 10월 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긴 연휴의 한복판에 추석날이 끼어 있으니 긴 연휴 조용히 책이나 읽고 싶다는 심사의 한 복판에 커다란 돌덩이가 하나 던져진 것만 같은 형국이다. ‘수졸재’ 혹은 ‘호접몽’이라고 이름붙인 저자의 살림집이자 작업실, 경기도 안성 금광호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넌지시 더듬거린다.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책을 모두 읽고는 ‘예술가가 시골에서 산다는 것’ 으로 고쳐서 읽어본다.


“... 노모를 모시고, 골드레트리버 ‘능구’, 진돗개 ‘능소니’, 삽살개 ‘바우’와 함께 산다. 노모는 텃밭 가꾸기에 열중하고, 견공들은 눈 감고 명상을 하거나 오수吾睡를 즐긴다. 노모와 견공들과 저 사이는 대체로 불화가 없고 화목한 편이다. 가끔은 시를 써서 견공들에게 읽어주기도 하는데, 그게 이들의 시골생활에서 답답함과 권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한다...” (pp.10~11)


삼십대까지만 도회지에서 살고, 사십대가 되면 바닷가에서 살고, 오십이 넘으면 산촌 마을로 들어가 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진 적이 있다. 그 바램은 그대로인데 나이만 먹었고 나는 여전히 도회의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이명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십여 분 거리에 살고 계신다. 나는 부모님의 발치에 살고 있는 셈인데, 덕분에 발 빠르게 부름에 응답할 수 있다. 이를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저 모던과 첨단과 문명이 있는 ‘서울’과 ‘수졸재’ 사이의 칠십 킬로미터라는 이격은 지리의 이격이며, 또 심리의 이격이기도 합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칠십 킬로미터의 이격에 나는 안도합니다. 나는 모던과 첨단과 문명을 내 삶의 배후에 둡니다. 이제 내 삶의 전면은 바람이고, 물이고, 숲이고, 명상이고, 산책이고, 느림입니다.” (p.22)


지상 최대의 연휴여서 귀경과 귀성의 인파가 분산될 것이고 그래서 지상 최소의 이동 시간을 기록할 것처럼 설레발을 치더니만, 막상 10월 4일의 한반도 남녘 곳곳은 지상 최악의 정체를 기록했다. 저녁 뉴스에 열 중 여섯은 추석을 그저 연휴의 하나로 여긴다는 통계가 흘러나왔는데, 이를 두고 아내와 나는 그러면 뭐 하나 열 중 넷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추석 명절의 핵심인데, 객쩍은 소리를 주고받았다.


“일찍이 말의 한계를 선취하고 절망해본 자들만이 침묵으로 나아간다. 침묵은 내면의 신성한 부동성의 반영이다. 침묵은 말없음을 넘어서는 데 있다. 말없음은 피동성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말없음은 단지 말의 빈곤, 소극적 수락, 불충분한 의사표현이다. 더러는 말없음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을 피동적으로 용인하는 비열함에 귀결된다.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말없음이다. 말없음은 의미의 부재, 가치의 부재라는 속성 때문에 결국은 소음의 세속성으로 전락한다. 침묵은 그 말없음의 피동성을 역겨워한다. 침묵은 말없음의 몰염치, 몰가치성을 부정하는 자리에 제 영지를 만든다.” (pp.71~72)


예술가에게 시골이 주는 영감, 그러니까 도회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영감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글을 읽는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다. 길에서 지체된 시간들, 끝도 없이 늘어선 그 많은 차들이, 그 차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만 가지의 소란들이 길 위에서 길 아닌 길을 내달리고 있는 동안, 앞차의 후미진 벌건 등만 깜박거리는 모양을 보아내느라 생긴 두통이 조금 가셨다.


“삶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삶의 길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아무리 애써 찾아 헤맨다고 해도 없는 길이 찾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없는 길을 찾아 헤매던 그 부질없는 정열이 이제 그를 찌르는 정열이 된다... 애초부터 길은 삶에 선행한 어떤 절대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의 뒤에 따라온다. 사람들이 찾으려는 길은 허상이다. 욕망과 관념이 만든 길!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괴로워하다가 죽는다. 길은 그 뒤에 있다.” (p.225)


아직 하나의 추석 일정이 남아 있다. 나는 내일 다시 길 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 길은 이미 ‘태어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다가’ 죽은 이를 찾아는 길이면서, 그 뒤를 따라 더듬거리며 여태 헤매는 이들의 길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난 길인지 뒤에 생기는 길인지 알지 못하는 채 여태 살아왔으므로, 계속 그리 살 것인지 아니면 여태 그리 살아왔으므로, 계속 그리 살지는 않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자들의 길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 길이 위태롭지 않기를...



장석주 / 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 다산책방 / 291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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