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책 스무 권의 마음으로 떠났다가 책 열 권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여행...

by 우주에부는바람

*2017년 10월 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장장 십여 일에 걸친 연휴 중이다. 십여 일짜리 온전한 여름휴가를 갖는 것도 언강생심인 이곳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다. 동생 내외는 딸 그리고 장모님과 함께 일본 여행에서 오늘 돌아오는 중일 것이다. 아내의 회사 직원들은 그 중 절반이 해외로 나간다고 했단다. 대학 후배는 온 가족이 북아메리카를 여행 중인 듯한데, 한 달 일정의 절반 정도를 소화한 듯 하다. 제주도의 선배 부부는 이제 곧 보름 일정의 전국 일주를 시작하리라고 스스로에게 엄포를 놓았다.


“인생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산의 길은 성실한 길이다. 어떤 산길이라도 가볍거나 호락호락한 길은 없으며,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는 무색무취의 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왔는데도 맨송맨송한 상태에 있거나 그 상태로 세상 먼지에 휩쓸려버린다면 그 사람은 산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 딴 데 다녀온 것일 것이다.”


고양이 용이와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나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연휴 기간 중 스무 권의 책을 읽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혼잣말에 불과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집과 방 매니아에 가까워서 아무리 긴 시간이 주어져도 먼 여행을 선택하지 않는다. 아내는 내가 여행에 크게 목말라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각자 책 쇼핑을 했다.


“괴산의 한 작은 동네에 꽤 좋은 술집 하나가 있단다. 이 술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고 허름한데다 그날그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역시나 동네의 그렇고 그런 술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오가면서도 들르고, 약속을 해서도 들르고, 그러다 누군가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서도 생각이 날라치면 그 늦은 시간 술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그런 곳이었단다. 단골은 새 사람을 데려와 단골을 맺어주고 새로운 단골은 오리지널 단골을 단골인지도 모르고 데려와 자기가 먼저 으스대며 다리를 놓기도 하는, 뭐 동네에 하나쯤 있을법한 달달한 술집이었단다.”


새로 구입한 책들을 책상 가장 가까운 곳에 쌓아 두고도 괜스레 여유로워진 시간을 탓하며 책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훑기도 하고, 책의 겉면에 쌓인 먼지를 후후 불기도 하였다. 읽다만 두툼한 책들, 포스트 잇으로 표시된 책장을 다시 펼쳐 보기도 하였다. 잠 안 오는 밤 뒤척이듯 여러 책들을 뒤적이다가 이병률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는데, 읽어보니 읽지 않은 것이 맞았다.


“나와 많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두렵다. 비슷한 사람하고의 친밀하고도 편한 분위기에 비하면 나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속을 여미게 된다. 그럴수록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겠다면서 여러 시험지를 들이대고 점수를 매기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기준과 중심들을 꺼내놓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이해하는지 이해 못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참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의 박자를 가지고 살며 혼자만의 시력만큼 살아간다... 우리는 그 모두를 겪겠다고 ‘인간 소믈리에’의 자격으로 태어난 것. 남의 ‘다름’을 한낱 ‘이상함’으로 보겠다는 포즈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세상의 여러 맛이 차려진 특급 식당에 입장할 권리를 잃는다.”


여행 산문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병률의 책이 세 권 있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중 세 번째 책이다. 다른 책들처럼 챕터도 페이지도 없고 대신 사진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다. 글이 소박한 것처럼 (소박한 것과 유치한 것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이병률의 글들도 그렇게 애매하다. 소박하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그렇다.) 사진들도 꽤 소박하다.


“아름다웠던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 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나는 스무 권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실제로 나는 열 권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의 마음이 책 스무 권의 마음이라면, 여행에서 돌아올 때의 마음이 책 열 권의 마음 정도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대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였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상념을 크게 내려놓고 돌아와도 괜찮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쨌든 모두에게 여행 같은 추석이면 좋겠다.



이병률 / 내 옆에 있는 사람 / 달 / 312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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