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감독의 신념이 살뜰히 포함되어 있는 시인의 일상 독백...
켄 로치의 첫 번째 연출작은 1962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작년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까지 사십 여 편의 영화를 연출하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영화라는 수단을 통하여 관철시키는 일에 지금까지 매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를만한 형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다가 문득문득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케이티가 깡통을 따서 허겁지겁 내용물을 손으로 파먹는 것과 같은 장면에서...
“... 써야겠다가 아니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먹어졌다. 배가 무척 고팠다. 배고플 때 글은 쓰이고 그럴 때 쓰는 글이야말로 단순하다... 이 책에서 읽게 될 글들은 그러니까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쓴 것들이다. 배고픈 마음가짐으로 쓴 글...” (p.8)
김현은 시인이고 《글로리홀》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김현, 과 이름이 같다니, 어쩐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갖은 고초를 치렀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렇게 시집도 내고 어엿하고 재미있는 산문집도 내고 한 것을 보니 이유 없이 정감이 간다. 사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고, 실린 글들 그 글들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마음에 들은 것이겠지...
“... 나는 사랑이 끝끝내 이기는 영화에 더는 끌리지 않는다. 지금은 사랑이 끝끝내 이긴다고 해주는 영화에 더 혹한다. 비록 지더라도. 비록 지고 있는 동안에 중단될지라도. 마찬가지로 나는 선의가 이기는 영화보다는 선의가 이긴다고 해주는 영화가 더 좋다.” (p.35)
“나는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 지금 이곳의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비록 힘들겠지만, 결국엔 모두 다정한 입맞춤을 아는 얼굴로 스스로를 완성해 갈 것이다. 그렇게 선언하고 싶다. 그러니까 미래는 결국 뽀뽀하듯 오는 것. 혐오에 미래가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p.42)
자신의 애인을 ‘짝꿍’으로 부르거나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대하는 애정의 방식으로 유추하다보면 좀 연식이 되었나, 싶었는데 책 속에서 확인한 대로라면 98학번이다. 특히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글들에서 작가의 성정이 드러나는 순박한 문장들이 종종 발견된다. 세상에 대한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그 애정의 결이 켄 로치가 자신의 영화에서 드러내는 세상을 향한 애정의 결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버젓이 ‘켄 로치에게’라는 부제를 사용하였겠지...
“시집 몇 권 읽는 일조차 쉽지 않은 때다. 그러나 여전히 쓰는 사람이 있고, 그러니 계속해서 읽는 사람이 필요하다. 읽는 사람만이 결국 문학의 증인이 될 수 있다. 모든 문학은 각자의 생활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남녀노소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생활의 신파 속에 함몰되어서는 안 될 인간의 성장에 관하여. 인간의 성장 속에 함구되어서는 안 될 생활의 퇴화에 관하여. 우리가 다시 발견해야 할 것과 우리가 새로이 발명해야 할 문학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문학은 결국 읽은 사람에게만 물음을 남긴다. 문학은 생활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은 그 패배에서 승리를 맛본다.” (pp.48~49)
책의 일러두기에 보면 ‘이 책은 존 힐이 쓰고 이후경이 옮긴 《켄 로치》(컬처룩, 2014)를 참조’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책을 읽고 켄 로치에 대한 존경의 염이 다시 한 번 일어 그 책을 찾아봤다. 켄 로치의 작품 중 그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랜드 앤 프리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세 편 정도만 본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듯하여 구매는 하지 않기로 했다. 켄 로치는 역시 영화가 먼저지, 하는 심정이었다기 보다는 28,000원이라는 가격을 확인하고 일단 한 반 물러선 것인지도...
『인터뷰를 하는 동안 켄 로치의 얼굴에 수시로 햇살이 내리비쳤다. 불편한 듯 눈을 찡그리는 그에게 자리를 바꿔 앉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괜찮다. 곧 해가 기울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작은 배려지만, 그 따뜻한 맘이 그대로 와 닿았다. 그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진 않는다 했다. 자신은 그저 “미력하게나마 돕는 것뿐”이라고 했다.』 - (p.57, 2002년 6월 14일 <씨네21>에서)
‘켄 로치에게’라는 부제를 보고, 혹시 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인가 싶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만 하기에도 좀 그렇기는 하다. 그러니까 책에 실린 산문들은 켄 로치에게 바치는 헌사이면서 동시에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한 시인의 독백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기 위해 켄 로치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시인의 시를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중간하지만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안철수의 극중주의와는 많이 다르다고나...
김현 / 이부록 그림 / 걱정 말고 다녀와 : 켄 로치에게 / 알마 / 225쪽 / 2017 (2017)
ps. 산문집에 영국에 있다는 ‘구름감상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듣자 하니 영국에는 ‘구름감상협회’가 있다고 한다.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구름 관찰담을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며 ‘함께 구름을 산다’는 것. 지어낸 것인 줄 알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과연 회원들이 직접 관찰하고 촬영한 다양한 구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든 구름을 보았다. 영국에 거주하는 한 구름감상협회 회원은 다른 회원들이 발견한 개성 넘치는 구름을 보기 위해 협회 홈페이지를 드나드는 일상을 자기 블로그에 적어놓기도 했다. 구름감상협회 설립자는 개빈 프레터피니라는 사람. 그가 쓴 책은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제목은 《구름 읽는 책》...”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