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불러들여진 소설가의 그리스식 여행법이랄까...
*2017년 7월 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여행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해본 지 오래되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동생 녀석은 일 년에 서너 번 가족들과 함께 집을 떠난다.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 정도를 휴양지에서 머물다 돌아온다. 그 사이 동생네 토끼 연희를 엄마가 돌본다. 가까운 곳에서 까페를 하는 선배 내외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집을 떠나는 듯하다.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 그들의 고양이는 그들과 한 집에 사는 후배의 친구가 돌보는 듯하다.
“... 떠도는 것과 머무는 것의 차이에 대해 골몰하고 남겨진 것들과 기다리는 것들을 떠올리며 쓸쓸함이 더해진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그런가 싶었다. 돌아가야만 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돌아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지친 몸과 이국의 문화에 익숙해질 무렵 여행은 끝이 난다.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여행의 끝을 일러준다.” (p.49)
난다, 걸어본다 시리즈의 여행은 물론 내 주변의 여행들과는 다르다. 그들의 여행은 훨씬 길다. 그들의 쓸쓸함, 망설임, 안도감, 익숙함 등은 어쨌든 그 시간들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 시간들과 그 시간들에서 비롯된 바로 그것들을 읽는 일에 살짝 중독되어서 이 시리즈의 책들을 빠지지 않고 사서 읽는 중이다. 물론 시리즈의 서두에 발간된 책들에서 발견되었던 밀도는 어느 순간부터 꽤나 약해져버렸다. 그것이 아쉽다.
“요르고스는 한 번도 메초보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가 가본 곳이라고는 근처의 도시들이 다였다. 이오안니나와 테살로니키, 라리사와 칼람바카 같은 도시에 간혹 친척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했던 일을 빼곤 그는 평생을 산골 마을인 메초보에서 살았다. 그는 평생 식당에서 고기를 구웠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그는 하루를 산 것처럼 허망한 마음이 들곤 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매일 똑같은 하루가 51년이나 흘러버렸다. 지난 모든 일들이 어제 일어난 것처럼 또렷했다. 마을은 바뀐 게 없었고 그의 하루도 바뀐 게 없었다.” (p.36)
시리즈의 열네 번째 책은 소설가인 백가흠이 그리스를 대상으로 작성한 것이다. 어쨌든 여행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형식은 소설에 빚지고 있다. 단편소설에서 엽편소설까지 자유롭게 넘나든다. 다만 그 배경은 역시 그리스이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와 그리스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테셀로니카가 그 배경이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한 한국인 혹은 그곳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인, 그리고 최근의 이민자들이 주인공이다.
“... 언제나 지금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다. 지금을 넘기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어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테네에서의 첫날이었다...” (p.215)
특히나 책의 후반부에 실린 몇 편의 이민자 이야기는 마치 슬프고도 아름다운 오래전 동화처럼 서늘하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유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로 들어온 그들 혹은 그녀들의 몇몇 이야기를 읽으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지금껏 인간 사회가 만들어왔다고 여긴 여러 가치들이 비끗거리는 것을, 그 인간 사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혹은 아테네를 품은 나라에서 보는 일이 힘겹다.
“그리스는 모계 중심의 사회이다. 우리가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제에 가깝다면 그리스는 어머니가 삶의 중심이다. 유산 같은 것도 딸에게 물려주는 게 일반적이고, 결혼 후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 또한 많다. 그곳에서 알게 된 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1층엔 친정어머니가, 2층엔 여동생 가족이, 3층엔 맏이인 딸 가족이 사는 식이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IMF 구제금융으로 촉발된 경제난으로 급격한 가족의 붕괴를 겪은 것과 달리, 그리스는 우리보다 더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평온한 이유가 그것이라고 믿는다...” (p.219)
그리스가 (아마도 상대적으로) 모계 중심의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칠고 투박하고 큼직큼직해 보이는 그쪽 남성들의 모습에서는 유추할 수 없었던 사실이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라는 영화에서 유추되는 인상과도 다르다.) 책을 마치며 하는 작가의 말이 아니었다면 책의 내용 전반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전통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 여성성이 좀더 지배적인 사회를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신뢰한다.
그리스는 달랐다 / 백가흠 / 난다 / 219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