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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제 내린 비로 습습해진 마음은 여태 강력 제습되지 않고...

by 우주에부는바람

*2017년 7월 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오늘 새벽까지도 내렸는데, 빗소리 속에서 박준의 글들을 읽었다. 박준의 글을 읽는 동안 고양이 용이는 꼬리로 탁, 탁, 탁, 빗소리에 맞추기라도 한 듯 소파를 두드렸다. 잠시 손을 뻗어 가만히 꼬리에 손바닥을 덮었다. 그건 마치 스태플러로 종이를 고정시키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자 고양이 용이의 꼬리는 탁, 탁, 탁, 위에서 아래로 두들기는 대신 샤라락, 샤라락, 샤라락, 뱀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어느 커다란 무덤 앞에서 / 당신이 내 손바닥을 펴더니 / 손끝을 세워 몇 개의 글자를 적어 보였다. / 그러더니 다시 손바닥을 접어주었다. / 나는 무엇이 적힌 줄도 모르면서 /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그해 경주... (p.15)


“사람에게 미움맏고. /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행신... (p.103)


책에는 그해 경주를 비롯해서 그해 인천, 그해 경주, 그해 협재, 그해 화암, 그해 묵호, 그해 혜화동, 그해 삼척, 그해 연화리가 있고, 그리고 그해 행신이 있다. 시인은 여기에 잠자코 있는 대신 거기로 가서 잠자코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인은 정중동靜中動의 실천자라고 여기고는 하였는데, 시인의 행보를 보니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시인은 자꾸만 어딘가로 가서 가만히 있는데, 그게 가만히 있는 것만은 아니다.


『... 어디에서도 무거운 인간관계를 현명하게 덜어내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런 내가 임시방편으로 택하는 방법은 휴대전화를 끄는 것이다. 그러고는 혼자 낯선 도시에 가서 숙소를 잡고 며칠이고 머문다. 여행보다는 도피라 불러야 좋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배달 음식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철지난 사랑이나 함부로 대했던 지난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린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p.50)


박준의 시가 아주 좋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얼마나 좋았는지 나는 그의 시를 읽고 이렇게 적었다. “눈물과 울음 둘 중에 하나만 품에 안아야 한다면 눈물이 낫겠다. 목젖에 걸려 있던 슬픔이 울음이 되어 세상에 나올 때, 그 울음의 산통을 마중해야 할 때 마음은 극심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눈물이 낫겠다. 눈의 샘 건너서 지극히 초롱해진 눈물은 태어나면서 죽는 울음과는 달리 제 살아온 흔적을 뺨에 남기니 그 뺨을 어루만져 애도할 수 있다. 그러니 눈물이 낫겠다.” 라고... 그의 시집이 TV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래서 싫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pp.81~82)


산문집의 제목에 ‘운다’가 들어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울음보다는 눈물이 낫다고 여겼지만 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때 울지 못하고 그 울음을 잘못 삼켜서 오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나는 나의 엄마가 이즈음 겪는 이명의 고통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오래전 2틀간 집을 비우겠다,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섰던 엄마는 고작 이틀을 채우지 못하고 귀가하였다.


“... 모든 사람이 이런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꼭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p.146)


둘쑥날쑥 하는 길이의 글들이 산만해 보이지만 그것이 마음을 들쭉날쭉 하게 만드는데 보탬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혼란을 틈타 비가 내렸고 이제 그친 것이다. 아니면 비가 내리는 틈으로 혼란이 새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 내린 비의 여운이 남아 습습해진 집안은 강력제습의 기능을 가동하여도 쉽사리 온전해지지 않는다. 고양이 용이는 어제 그 자리에 있고, 어제 내가 있던 자리에는 아내가 있다.



박준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난다 / 191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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