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편린들이 작은 사이즈 풍경화처럼 전시되어...
한때 나는, 내일 해도 되는 일을 오늘 미리 하지는 말자, 라고 큰소리를 치며 살았다. 물론 오늘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은 그날 무조건 하거나 아예 실행을 그만 두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이다. 그렇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살고 또 살고 하다 보니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한 걸음씩 차곡차곡 걸어서 여기 도착한 것인지 조금 의심스럽다. 나는 너무 느긋하게 굴거나 너무 서두르다가 여기에 도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마음을 추스르려 하였다. 왼쪽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주말이었다. 목의 상하 운동과 좌우 회전 운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혹시 목의 움직임이 아예 불가능해지면 고양이 용이를 보살피는 일은 어떡하나 걱정하였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일으키기 전 조심스럽게 목을 움직여 보았다. 어쨌든 움직일 수 있구나, 안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니 슬로베니아의 민족시인 프레세렌의 동상이 보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노란 건물 2층 벽면에 그가 사랑한 여인상이 새겨져 있다. 창가에 서서 한 손을 들어올리며 수줍게 웃고 있는 율리아.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와 신분 차이로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루지 못한 사랑을 기리기라도 하듯 후대 사람들은 둘의 조각상을 서로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세워두었다. 사랑의 시 말고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두 사람의 애틋한 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나는 중얼거린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이 녹슬지 않는다고.” (p.76)
나는 너무 사소하고 작은 것에 안도하는 삶, 이라는 뻔한 소리를 스스로에게 던지며 실소하고는 했다. 시인의 산문들에 드러나 있는 일상 또한 나의 작고 사소하게 안도하게 사는 삶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가끔 그렁그렁 해지는 신파가 아니라 그 신파로부터 길어 올리는, 시인의 건조 기능으로 충분히 말라서 오래오래 간직될 그런 상념으로 연결되고 마는 그런 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 인기척에 새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고, 나는 배낭에서 청포도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새 한 마리가 손에 내려앉아 포도알을 쪼는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포도알들을 땅에 다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아,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요즘은 산책이나 등산을 할 때 묵은 곡식과 빵조각을 배낭에 챙겨넣는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것을 조금씩 뿌리며 걸어가면 새들이 날아와 쪼아먹는다. 특히 눈으로 덮인 산에서 겨울을 나는 새들에게 몇 줌의 곡물은 훌륭한 식량이다. 새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굳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산을 내려오면서 조금은 새가 된 듯 가만히 새소리를 내어볼 뿐.” (p.87)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근육이 뭉친 듯 부자연스러운 삐걱거림이 조금씩 위치를 조정해갔다. 나는 담이 든 것이라고 여겼다. 목덜미에서 왼쪽 어깨로 움직였던 근육 뭉침은 오른쪽 어깨로 조심스레 이동하더니 견갑골 옆을 거쳐 허리춤에서 마감되었다. 그 사이 아내가 새로 사온, 나는 뭐 이런 허접한 물건이 다 있나 흉을 보았던, 낮은 베개를 이용하였는데, 목의 상태가 이만했던 것은 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일상의 편린들이 작은 사이즈 풍경화처럼 전시되어 있는 것을 구경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문집의 읽기를 시작하고 한참동안 (산문집의 후반부에 접어 들면서 여기의 풍경이 간혹 등장한다) 대부분의 그림 속 풍경들이 여기가 아니라 저기 낯선 땅들의 것이어서 아쉬웠다. 저기의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편린들을 바라보면서, 여기의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편린들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에는 사진이 꽤 실려 있는데, 멋 부린 사진들이 아니라 글과 어울리는 사진들이어서 좋았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 나희덕 / 달 / 205쪽 / 2017 (2017)